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2. 

그렇게 학교 선택을 마치고 난 후 유학원을 다시 찾았다. 가기로 한 학교와 준비 사항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들려주었고, 심지어는 잘 만들어진 리스트까지 준비해 주었다. 리스트에는 비자 준비부터 짐 꾸리기, 방 구하는 법, 런던 생활에 대한 요약, 심지어 전기 콘센트(영국의 콘센트는 한국의 것과 달라 한국의 전자 기기를 사용하려면 흔히 '돼지 코'라 불리는 변환 플러그를 추가로 연결해야 했다.) 사용법까지 아주 자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리스트에 적힌 대로 준비만 한다면 1년 동안의 어학연수가 무리 없이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현실은 더욱 냉철했고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 리스트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리스트를 받은 후 인터넷 서칭을 통해 더 많은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에게 딱 맞는 정보는 아니더라도 그곳의 생활을 조금 더 면밀히 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사람에게(적어도 남자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는 모두 불필요한 쓰레기와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하루에 필요한 칼로리 이상으로 섭취하게 되면 나머지 열량이 지방이라는 쓰레기통으로 모이게 되듯(물론 지방이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는 것 또한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 후 보게 된 수많은 블로그와 인터넷 사설들은 모두 나에게는 사족과 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실제 경험처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는 정보를 찾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나에게 남은 건 비용 충당뿐이었다. 이제 영국으로 가기 위한 비용만 해결하면 나의 1년간의 어학연수는 아주 여유롭고 화려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의 비용을 사용할 것인가? 처음 누나에게 제안을 들은 순간부터 무의식중에 내 예산은 100만 원으로 정해져 버렸다. 막연히 100만 원만 있으면 된다는 누나의 말에 의심 한번 없이 마음속으로 확정을 해버렸다. 100만 원을 어떻게 쪼개서 어떻게 써야 할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고민은 했겠지만 어린 나에게 100만 원이란 돈이 조금은 여유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무모하면서도 부끄러운 일이다. 돈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한 개념은 더더욱 없었다. 이로 인해 나는 뜻하지 않게 상당한 모험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결심이 서자 돈을 벌어야 했다. 휴학생 시절에 영어학원 강사로 돈을 번 경험도 있었지만, 더 단순한 일을 하기로 했다. 아마도 이별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생각 없이 할 일을 찾았던 듯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약 2년간 몸담았던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맥도날드는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살던 곳에서 워낙 인기가 좋은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르바이트생이 20대 초반이거나 그 이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24살의 노땅(?)이 신입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것이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였지만(당시 정직원이 나보다도 어린 경우가 있었으므로) 나에게는 업무 환경이 익숙하고 단순해서 많은 생각이 필요 없는 맥도날드 아르바이트가 그 당시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가을학기가 지나가는 몇 달간 학교 수업과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돈을 모았다.     

목표로 한 금액이 100만 원이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일을 더 어렵게 만든 것은 돈을 모음과 동시에 써버리게 되는 나의 소비 패턴이었다. 어학연수를 결심하고 난 후 친구들에게 생각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친했던 친구들과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런저런 술자리가 마련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동시에 미련한) 일이었다. 하루 걸러 하루 술자리를 가졌다. 정말 원 없이 마셨다. 시련의 아픔이라는 안줏거리도 있겠다, 술을 안마실 이유를 찾는 것이 더 힘든 나날이었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물론, 노땅으로 입사한 맥도날드에서도 내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어느 사회건 부류와 무리가 존재하게 되는데 항상 특정 부류와 무리를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특유의 사회성으로 맥도날드 사회에서 각기 다른 부류들을 연결하는 인기인이 되어있었다. 내 한마디에 아이들이 몰려들어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셨고, 제각각이었던 맥도날드의 인맥이 나라는 존재를 매개로 엮여가고 있었다. 후문에 따르면, 내 덕에 많은 커플이 생겼다 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무언가의 중심에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그 자리를 지키고 싶어지게 된다. 어학연수 준비보다는 술자리가 좋았고 덕분에 시련의 아픔도 어느덧 옛날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학연수를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지금 내가 가진 생활이 아쉬워졌다. 시간이 다가오면서 송별회를 빌미로 술자리는 더 많아졌고, 하루하루 지나 이제는 정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 왔다. 결국 한국 땅에서의 추억만 늘었을 뿐 런던 생활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첫 타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작은 별것도 아니다. 유학에 대해 큰 뜻을 품은 것도, 그 후 진로에 대한 명확한 목표 의식이 있던 것도, 그렇다고 집안이 여유로워 경험 삼아 준비한 것도 아니다. 어학연수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명확한 목표 의식과 도전정신에 의해 시작되지는 않았다. 모든 도전이 거대한 마음의 변화를 이끄는 사건이나 큰 동기부여로 탄생하지는 않는다. 내가 겪었던 사소한 이별의 아픔이, 누나로부터 얻은 단순한 제안이,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의 작은 호기심이 나를 런던으로 보내는 거대한 도전을 만들어냈다. 작은 시작이 큰 도전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정도 동기라면 당신도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가 유학을 결심한 일련의 사건이 당신이 가진 동기보다 몇 곱절 더 큰가?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큰 계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생각을 조금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올해 초 의무적으로 목표를 세운 것이, 지난달 우연히 보게 된 TV 프로그램이, 오늘 아침에 읽었던 신문 기사가, 아니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이 당신에게 큰 도전을 시작하게 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큰 깨달음이나 동기부여가 모자라 아직 시작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일단 시작하자. 그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믿길 바란다. 아니, 창대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도전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도전이 반드시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자. 안나푸르나 14좌 등반을 눈앞에 두고 실족하여 고인이 된 등산가 故 고미영 대장이(물론 많은 도전에서 성공을 이루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성공적 행보에 의해서만 훌륭했다고 평가받지는 않는다. 그녀의 마지막 도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높이 평가받을 만했고, 그 끝이 비극이었기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그러니, 일단 시작해 보자. 당신의 도전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당신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당신이 도전을 결정할 때이다.     

2005년 2월 드디어 런던으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김해 국제공항으로 가서 오사카 행 비행기를 탔고, 일본항공에서 제공해 주는 호텔에서 1박을 한 후 다시 런던으로 가는 비행 편이 예정되어 있었다. 일본에서의 하룻밤은 아주 좋았다. 사실 일본을 가본 것도 처음이었거니와 호텔이라는 고급 숙박업소를 이용한 것도 몇 번 되지 않은 나로서는 호화로운 호텔 서비스가 아주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시간에 도착하게 되어 일본 구경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호텔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글로벌 인재가 된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은 나의 호화로운 여행의 최고점을 찍었다. 간단하지만 수준 높은 호텔 조식으로 유학 생활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아쉽지만 만족스러웠던 오사카에서의 기억을 뒤로하고 런던 행 비행기에 올랐다. 런던까지의 비행은 비행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아주 신기하면서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었다. 비행기 아래로 어딘지 알 수 없는 대륙이 연속적으로 펼쳐지고 있었고, 어둑어둑해질 때가 넘었는데도 태양은 계속 그 자리에 있는 듯했다.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 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기내 화장실이 셀카를 찍기에 아주 안성맞춤의 장소라는 것이다. 적절한 조명에 조용한 공간으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찍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지금 내가 간직하고 있는 유학 생활 사진 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모두 한번 시도해 보길 바란다. 기대 이상의 사진이 탄생할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의 지루함을 호기심으로 달래기가 역부족이 되어갈 때쯤, 곧 히스로 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내용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무려 12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히스로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설렘이 밀려오고 있었고, 들뜬 마음에 얼른 뛰어내리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앞으로 다가오게 될 일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비행기가 멈추고 입국장으로 향했다. 입국심사에서 흔히들 겪게 되는 많은 일을 인터넷으로 보아 왔던지라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최악의 경우에는 입국장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곧장 다음 비행기로 쫓겨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입국 심사는 미국만큼이나 엄격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밝은 미래로 가득 찬 나에게 영국의 입국 심사장은 쓸데없이 무거운 곳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입국 신청서를 작성한 후 길게 늘어선 줄을 섰다. 입국장은 자국인, EU 회원국, 외국인의 세 개 구역으로 나누어졌는데 EU 회원국과 자국인의 입국은 대단히 간결하면서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외국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여권과 입국서류를 하나하나 뜯어가며 까다로운 심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주 불합리한 처우처럼 느껴졌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는 것만 같았다. '왜 외국인만 저렇게 까다로운 걸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영국이라는 나라를 경험하는 나에게 첫인상이 좋지 않게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비교하면 영국은 너무도 차가운 나라인 것 같았다. 후에 생각한 것이지만,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금껏 내가 이런 경험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이런 상황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내가 외국인이면 어땠을까? 한국에서 사는 게 불편했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외국인들, 그중에서도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국력이 약한 국가의 사람들은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영국과 한국을 오고 가면서 내가 처했던 불편하고도 불합리한 상황을 그대로 겪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을 뿐.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각자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감사한 경험이 몇 번이나 있을까? 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아마 내가 애국심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외국인으로 타지 생활을 겪어보면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자국민이라는 이유로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혜택이 본인이 원하는 혜택이 아닐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는 이 국가의 국민이고 그로 인해 일정 수준의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가 외국인으로서 불편을 겪고 나니 그동안 나에게 베풀어졌던 국가라는 존재의 호의가 감사하게 여겨졌다. 적어도 한국으로의 입국 시에는 많은 외국인이 겪게 되는 불편을 나는 최소로 받고 있으니 말이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다 내 차례가 왔다. 큰 가방에서 School Letter(입학 서류)와 입국 신청서, 그리고 여권을 심사관에게 건넸다. 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지만, 속마음은 떨리고 있었고 심사관의 표정은 심하게 굳어져 있었다. 사실 심사관의 얼굴은 나 이전부터도 심히 굳어져 있었다. 그들은 아마 그렇게 행동하도록 교육받았는지도 모른다.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이름, 국적, 입국 사유, 체류 기간, 거주할 곳 등...... 무서웠다. 우리가 한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 혹은 영어로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그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웃어주었다. 모든 이야기는 적절한 농담과 유머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에게는 모두 그런 미션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몇 가지 질문에 여유를 가지고 대답을 하던 나는 심사관의 'Don't laugh. (웃지 마세요)'라는 말에 완전히 얼어버렸다. 웃지 말라니? 내가 알던 영국 신사 숙녀들은 모두 어디 갔단 말인가? 나에게 농담을 건네고 유머를 건네던 상냥했던 영국인들... 그들은 진정 지금껏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란 말인가? 얼어버린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아주 간단한 질문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입학서류를 달라는 그에게 학교 영수증을 들이밀고, 어디서 묶느냐는 물음에 "One year(1년이요)"라고 대답해 버렸다.     

문제는 사소한 실수에서 생겨난다. 사실 내 비자는 6개월짜리였다. 1년간 공부하기로 했지만, 학교나 현지 상황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학원을 6개월만 등록했다. 보통 6개월을 등록하면 방학을 고려하여 적게는 7개월에서 많게는 8개월까지 비자를 승인해 준다. 상황에 따라 비자를 연장할 수도 있고, 불법적이긴 하지만 비자 만료 후 유럽 여행을 통해 여행 비자로 전환하면 6개월의 추가 비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통 그렇게들 한다고 유학원 직원분에게 설명 들었다. 나 역시도 굳이 비용을 더 들여서 1년 비자를 받는 것보다 쉬운 길을 택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에게 이러한 편법을 정당하게 밝힐 수 없을뿐더러 설령 밝힐 수 있다 하더라도 영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심사관의 질문이 이어졌다. 전부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뉘앙스는 이랬다.

"왜 1년이나 머무는 거죠? 당신의 비자는 6개월 후 만료됩니다. 나머지 6개월 동안 무엇을 할 생각인 겁니까?"     

영국이라는 나라는, 특히나 런던이라는 도시는 완벽한 International City로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으로 공부나 일을 하기 위해 몰려들어 엄청난 인구수를 자랑한다. (물론 서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런던 역시 취업난이 대단한 곳이었고, 자국민의 일자리 보호를 위해 그들 역시 취업과 거주의 규칙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나는 자국민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이다.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린 나에게서 뭔가 수상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큰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심사관 앞에서 나는 자신감도 여유도 가질 수 없었다.     

'연장하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연장…… 연장...... 연장이 영어로 뭐였더라?'

이미 언급했지만, 영어에 자신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이 오자 extension(연장)이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닥쳐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심사관의 질문이 이어졌다.

"돌아오는 편의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세요."

1년 오픈 비행 편으로 티켓을 구매한 나에게 리턴 티켓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다행히 인터넷으로 프린트해온 오픈 티켓 구매 서류가 있었기에 심사관에게 보여주었다. 심사관은 티켓을 보더니

"Are you going to have your Visa extension? (비자를 연장할 계획인가요?)”

라고 물었다. 그렇지! Extension! 내가 찾던 그 단어였다. 나는 기쁜 마음에 Yes를 연발했고 심사관은 안심한 듯 고개를 떨구더니 다른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영어가 부족한 것을 알았기에 어느 정도 배려를 해준 듯하다.     

어학연수를 준비하는 동안 입국 심사에서 입국을 거부당한 많은 케이스를 보아 왔기에 말문이 막히는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상상이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입국을 거부당하고 곧장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위급할 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사건은 해결되기 위해 발생하는 것이고 되어야 할 일은 반드시 되게 되어 있다. 당시 내가 extens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내지 못해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한국으로 추방당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입국을 거부당하는 것은 입국 허가를 받는 것보다 애초에 더 어려운 일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말에서 내가 원하는 extension이라는 단어를 찾아낸 것은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당신이 해야 할 최고의 선택이다. 인생은 불확실하고 일어날 사건들은 무수히 많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어떠한 일에도 당황하지 않게 되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언제나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같은 문제가 반복될 확률은 아주 낮거나 없다고 봐야 한다. 결국 불확실한 미래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걱정과 고민으로 도전을 포기할 이유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수시로 일어날 예정이었다.

이전 02화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