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유급
첫째 아이가 0학년에 다닐 때의 일이다. 반에 유독 키가 큰 아이가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아이들마다 키가 다르니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이 엄마와 친해지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0학년을 두 번째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걸 불안해해서요. 좀 느린 편이라 선생님과 상담해서 0학년을 한 번 더 다니기로 했어요." 엄마의 설명은 이런 경우는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첫째가 1학년에 올라갈 때, 또 다른 소식을 들었다. 같은 반이었던 아이 중 한 명이 0학년에 다시 남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키도 크고 씩씩해서 어디서든 리더 역할을 하던 아이였다. 정말 의외였다. 알고 보니 이런 일이 덴마크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특히 유치원에서 학교로, 또는 0학년에서 1학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유급을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유치원에서 놀기 위주의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학습 중심의 학교생활로 바뀌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아이들 때문이다.
이 상황을 대하는 덴마크 사람들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학교 입학 전 상담에서는 부모와 교사가 아이의 학교 입학 준비 상태를 꼼꼼히 점검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교사가 아이에게도 직접 묻는다는 것이다. "학교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니?" 아이와 부모 모두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해야 0학년에 등록할 수 있다.
학기별 상담에서는 더욱 세심한 관찰이 이뤄진다. 0학년 두 번째 학기 상담에서는 1학년 진급 여부를 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아이가 진급에 대한 부담을 표현하면, 부모는 교사와 함께 아이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한다. 결정은 언제나 모든 당사자의 합의 하에 이뤄진다. 아이, 부모 교사의 논의 후 진급 또는 유급이 결정된다.
놀라운 건 유급의 이 모든 과정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것을 더 큰 문제로 본다. 실제로 각 학년마다 1-2명 정도는 이런 선택을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한 해를 더 보내며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해 나간다.
덴마크의 이런 접근법은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교육은 경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아이가 같은 속도로 발달할 필요도, 같은 시점에 같은 단계를 통과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아이가 준비되었을 때,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에 아이 자신의 목소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덴마크에서 만난 '느린 성장'의 지혜. 한번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