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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영화 속 장애인, 다시 보고 다른 질문하기⓵

1. 러스트 앤 본

by 해린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글이 있었다.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나의 감각과 경험으로 해석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면 겁이 났다. 영화 비평은 전문가의 영역처럼 느껴졌고, 관점도 글쓰기 능력도 한정적인 내가 감히 도전해도 되는지 스스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속의 욕망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에 문화센터에서 12주 과정의 영화 비평 교육을 들었다. 수업이 이어질수록 전문 용어들이 쏟아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무슨 말인지 따라가기조차 어려웠다. 몇 번이나 수업을 빠지면서 ‘등록비가 아까워 포기도 못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리고 결국, 자신감은 더 떨어졌다. ‘영화 리뷰는 내 세계가 아니구나’ 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안에 굴러다니던 영화 잡지를 무심코 펼치다 갑자기 다시 의욕이 되살아났다.
멋진 분석을 쓰지 못하면 어떠랴.
그것도 지금의 나이자, 나의 방식이다.
그동안 마음속 서랍에 조용히 넣어두었던 영화들을 꺼내어 다시 바라보고, 나만의 언어로 기록해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연재의 첫 번째 영화로 '러스트 앤 본'(Rust and Bone)을 선택했다. 오래된 영화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작품 중 장애여성의 욕망과 주체를 가장 솔직하게 담아낸 영화이기 때문이다.


1. 다시, 내 몸으로 살아내기

스테파니는 돌고래 쇼 사고로 양쪽 다리를 잃는다. 절망과 고립 속에 머물던 어느 날, 클럽에서 스쳐 지나갔던 전직 권투 선수 알리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연락을 한다.

예전엔 이 장면이 못내 불편했다.
“왜 장애여성이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통로가 비장애 남성이어야 하지?”
수동적이고 보호받는 여성 서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새롭게 보였다.

만약 내가 스테파니였다면?
아마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두려움 때문에 연락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테파니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보호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알리에게 손을 뻗은 것이었다.

그 선택 이후 그녀는 알리를 ‘구원자’가 아닌, 세상과 다시 마주하게 하는 매개로 활용한다. 슬픔과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서 아주 느리지만 분명하게 ‘다른 방식의 삶’이 움트기 시작한다.

수많은 영화들이 장애를 극복해야 할 장벽으로 그리지만,
〈러스트 앤 본〉은 장애를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보여준다.

“전에는 그렇게 살았고, 지금은 이렇게 살아갈 뿐.”
그 담담함이 이 영화의 중심을 조용히 떠받친다.


2. 욕망을 가진 여성,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

장애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은 집요하다.
사랑하기 어렵다거나, 성적 존재가 아니라거나,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는 식의 시선들.

나 역시 누군가와 만날 때면 주변의 반응이 늘 같았다.
비장애인과 만나면 ‘헌신하는 사람’,
장애인과 만나면 ‘끼리끼리’.
이런 시선들 속에서 자유롭지 못해 결국 아무도 만나지 않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욕망하고, 선택하고, 때로는 상대를 밀어내기도 한다.
감정을 요구하고, 거리를 조절하고, 관계의 규칙을 스스로 만든다.

장애여성이 관계의 주체가 되는 장면은 한국 영화에서도, 해외 영화에서도 보기 드물다.
그래서 이 장면들이 더욱 특별하다.

이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장애여성도 사랑할 수 있다”가 아니다.

“장애여성도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나는 그 선언을 분명히 느꼈다.


3. 장애를 가진 몸, 그리고 구원의 얼굴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신체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일이다.
감각의 순서가 바뀌고, 두려움의 크기가 달라지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마음이 무너질 수 있다.

나 역시 장애가 심해지면서 남아 있는 기능을 연구하듯 분석하며 일상을 새로 세워 온 경험이 있다.

스테파니는 원래 ‘몸의 자유’를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바다를 다시 바라보고, 물결에 손을 적시는 장면들은 장애를 가진 몸을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처럼 보였다. 극복이 아니라 재구성.

겉으로 보면 남성이 여성을 구원하는 구조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후반에 다다를수록 오히려 그 반대의 진실이 드러난다.
둘 중 누구도 누군가의 구원자가 아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장애여성 서사의 흔한 전형인

“비장애 남성이 장애여성을 구원한다”는 구조에서 미묘하게 벗어난 지점이 여기 있다.

이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상처의 온도로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균열을 통해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삶을 지탱하는 연대에 가깝다.

물론 이 영화가 생략한 현실도 있다.
장애여성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젠더 문제, 구조적 차별, 노동과 돌봄의 질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랑이 곧 치유처럼 그려지는 부분은 현실의 복잡함을 단순화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스테파니의 한 장면을 오래 기억한다.

바다 앞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던 얼굴.

절망도, 극복도, 구원도 아닌,
지금 이 몸으로 다시 살아보려는 한 사람의 의지.

익숙한 세계를 잃어버린 누구에게나 필요한 힘.
그리고 결국 그 힘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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