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녕, 헤이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사랑을 다룬 영화 가운데, 내가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둔 작품이 있다. 안녕, 헤이즐은 흔히 소비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도’나 ‘불쌍함과 감동’의 서사를 거부한다. 어딘가 숙련된 공식처럼 배치되는 동정의 시선, ‘감동 포르노’라 불리는 그 진부한 틀을 벗어나 있다. 이 영화는 그저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고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 아주 ‘보통’의 사랑 이야기다. 그 점이 내게 더 깊이 와 닿았다.
주인공 헤이즐은 산소통을 매고 다니는 장애 여성이다. 어릴 때부터 암을 앓으며 죽음이 삶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미동 없이 따라붙는다. 그녀의 하루는 조심스럽고 단조롭다. 집에서 TV를 보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오는 일상이 반복된다. 하지만 헤이즐은 죽음이 언제 자신의 문을 두드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녀가 좋아하는 소설 장엄한 고뇌의 문장, “고통은 느껴야 해”를 곱씹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녀가 가진 삶에 대한 독특한 통찰을 엿본다.
암 환자 모임에서 만난 어거스터스는 한쪽 다리를 잃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 결핍은 그의 성격을 줄어들게 만들지 않는다. 그는 밝고 솔직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 안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만들어 가는 관계는 꾸밈도 없고 과장도 없다. 그들은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조심스럽지만 자유롭게 경험하며, 각자의 삶 깊은 곳에 도달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장애를 가볍게 숨기지도, 불쌍하게 부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장애는 두 사람의 삶에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의 사랑을 설명하는 핵심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삶의 한 부분이며, 서로를 이해하고 다가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경험일 뿐이다. 두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애써 비극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순간에 집중하며, 서로의 존재를 통해 삶의 결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갈 뿐이다.
물론 이 영화를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기존의 비장애 중심 시각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영화보다는 훨씬 균형 잡혀 있다. 장애를 하나의 상징이나 메시지 도구로 소비하지 않고, 인물 자체의 내면과 욕망, 선택을 중심에 놓으려 노력한다는 점이 반갑다.
나는 헤이즐 같은 캐릭터가 더 많이 등장하길 바란다. 오래도록 반복되어 온 ‘취약한 장애 여성’,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서사’는 이제 지겨울 지경이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과정과 결말이 정해진 캐릭터들은 장애인의 삶과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 안에는 욕망도, 결단도, 애틋함도, 모순도 없다. 장애 여성을 오로지 약자로만 규정하고, 그녀의 삶을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해석해버리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도발적이고 매력적인 장애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 때로는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때로는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때로는 슬퍼하고 흔들리지만 자기 방식으로 선택하는 인물들 말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고, 길거리에서 마주치고, 때로는 사랑하게 되는 그 ‘평범하고 복잡한 인간’으로서의 장애 여성을, 영화 속에서도 만나고 싶다.
안녕, 헤이즐은 그런 기대를 향해 조금 더 다가간 작품이었다. 비장애 중심의 렌즈를 일부 걷어내고, 장애인의 일상과 사랑을 좀 더 자연스럽고 깊이 있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시도가 더 넓어지고 다양해져야 한다. 장애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 욕망과 관계, 실패와 선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콘텐츠가 앞으로 더 많이 세상에 나왔으면 한다.
장애를 둘러싸지 않는 사랑. 그것은 특별한 것도, 드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사랑을 살아가고 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문화 속에서도 당연하게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