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독서: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싶다

"글씨를 심어, 시를 쓰다"

by 에스더esther

"시는 견고합니다.

껍질이 단단해서 도무지 빈틈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수없는 고통을 이겨내며 나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비집고 비집어 틈을 열어 글씨의 씨앗을

심어보려 하지만 오히려 더 굳게 문을

닫아 버립니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마침내 조그마한 틈이 생기고 나는 글씨를

하나 심기 시작했습니다.

들어오고 나아가고 올라가고 내려가다

멈추고 서 있기를 반복하는 시간

결국 뜻과 소리를 드러내며

제 모양으로 자라는 글자들


시는 글자가 되고, 글자는 글씨가 되고 마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인가요.


글씨가 있는 시.


시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

시어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

활자로는 전달 되거나 표상되지 않는 이야기들

획 하나하나에 스며들고 입체적으로 일어나

또 다른 시어가 되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저 옛날 왕희지가 난정서를 썻듯이.

추사를 따르는 이들이 인왕산 아래

송석원에 모여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렸듯이


<책의 처음, '강병인 쓰다', 전문>


강병인 작가는 캘리크라피스트의 선구자이다.

그의 글씨를 닮아 보고자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를 닮은 캘리그라피스트를

꿈 꾼다. 마침, 강병인 작가의 글씨가 문정희 시인

시에 심어져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뜨거운 숨결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글씨로

사랑시집을 낸다


별인가 하면

온 몸을 때리는 종소리

피가 도는 생명이다


시와 문자향의

꽃 같은 만남이다


매혹이다


<문정희 시인의 서문 '뜨거운 숨결로', 전문>

마침내 시가 말을 걸었다고 표현하는 강병인 작가.

그의 글씨는 문정희 시인의 시에서 살아 움직인다.


언젠가는 나도 조금 흉내를 내어 스스로의 시를

어리버리하게라도 캘리로 심어보려 한다.


글씨가 심어진 시, 참 멋진 단어의 조합이다.


시인이 '언어의 마술사'라면, 글씨를 쓰는 이는

'붓끝으로 춤 추는 마법사'쯤으로 해도 좋겠다.

"나는 봄보다 먼저

사랑에 빠지고 싶다


돌 틈새에 숨긴 노래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고백의 씨앗들

그대 가슴에 꽃 피우기 전


제일 먼저 맺히는

이슬이 되고 싶다

사나운 봄바람이 되고 싶다"


<p.19. '초봄', 전문>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 년 백설이 되고 싶다


<p.171. '겨울 사랑', 전문>


"오늘, 나도 그러고 싶다. 당신에게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 년 백설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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