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
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
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 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
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p.181중에서)
일인칭 주인공과 못 생긴 여자친구(?)가 예술적
영감을 나누었던 슈만의 피아노곡인 [사육제]는 루빈스타인 연주가 최고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이 글을 읽는 내내 [사육제]를 루빈스타인 연주로
들었으며, 마무리 문장을 읽고난 후에도 한참을
슈만과 루빈스타인에 묶여 헤어나질 못했다.
이제 드디어, 책의 제목이자 맨 끝에 배치한 단편을
읽는다. 일인칭 단수.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평소 슈트를 입을 기회는 거의 없다. 있어봐야 일 년에 고작 두 세번이다. 내가 슈트를 입지 않은건 그런 옷차림을 꼭 해야하는 상황이 거의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캐쥬얼한 재킷을 입을 때는 있지만, 넥타이 까진 매지 않는다. 가죽구두를 신을 때도 거의 없다. 내가 스스로를 위해 선택한 것은, 어디 까지나 결과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유의 인생 이었다.
평소의 그는 캐쥬얼한 차림이다. 그런데 때때로 자진해서 슈트 차림에 넥타이까지 매는 장면이 등장한다. 캐쥬얼한 화자와 슈트 정장의 화자가 동일인으로서의 일인칭 단수다.
실제로 시험 삼아 잠깐 슈트를 입는 날이면, 이왕
슈트까지 입었으니 하면서 밖으로 외출도 한다.
정처없이 걷다가 슈트 차림이 불편해 지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캐쥬얼로 후줄근한 자세가 된다.
어쩌면 비밀스러운 의식일 수도 있는 화자의 슈트
차림은 어느 날, 아내의 외출을 핑계로 다시 감행 된다. 몇 년 전에 산 폴 스미스의 다크블루 슈트와
엷은 회색의 와이드 스프레드 셔츠에 로마공항 면세점에서 산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페이즐리 무늬 넥타이까지. 멋을 낸 그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상하게 거울 앞에 선 자신에게 께름칙한 위화감을 느낀것 빼고는 말이다.
화자는 마치 남 몰래 여장을 하는 남자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애매한 심정으로 길을 나선다. 밖은 기분 좋은 봄날 저녁이었다. 혹시라도, 동네 단골 바에 가면 슈트 차림을 하고 나온 이유를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좀 멀리 있는 곳의 바를 찾았다.
조명이 밝은 자리로 일부러 골라 앉아 '보드카 김렛'을 홀짝이면서 책을 읽기 시작한 화자는
여전히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으로 불편해 한다. 카운터 건너 편의 거울에 비치는 본인의
모습이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
하듯이-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 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 (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
지도 모른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선택해 온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제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 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p.223~224중에서)
이런 저런 상념 끝에 다시 마음을 잡고 독서를 계속
하던 화자에게 갑자기 낯선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로 접근한 그녀는 책을 읽는
화자의 행동을 비아냥 거리기 시작한다.
"멋 부리고 혼자 바에 앉아서, 김렛을 마시면서,
과묵하게 독서에 빠져 있는 거,,,"(p.226)
적대감이 담겨 있는 그녀는 어딘가에서 그를 딱
한번 만났다고 했다.화자의 친구와 친구라고도
했다. 그 때의 친구도, 지금의 그녀도 앞에 앉은
화자를 매우 불쾌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인칭 단수로서의 화자는 그녀의 말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고, 만남의 기억도 당연히
없었다. 그냥 재빨리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밖에.
터무니 없는, 불쾌한 일을 당하고 나왔는데도 그는
신기할 정도로 화가 나지 않더라고 했다. 그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계절은 더 이상 봄이 아니었고,
하늘의 달도 사라졌을 뿐이라는 정도. 일인칭 단수,
화자의 마지막 코멘트로 하루키 단편집의 탐험을
마무리 하기로 한다.
"그 곳은 더 이상 내가 알던 원래의 그 거리가 아니 었다. 가로수도 낯설었다. 그리고 가로수 가지마다
미끈미끈하고 굵은 뱀들이 살아있는 장식처럼 단단 히 몸을 휘감은 채 꿈틀대고 있었다. 스륵스륵 비늘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보도에는 새하얀 재가 복숭 아뼈 높이까지 쌓여 있고, 그곳을 걷는 남녀는 누구
하나 얼굴이 없으며, 유황처럼 누런 숨을 목 안쪽부
터 고스란히 내뱉고 있었다. 공기가 얼어붙은 듯, 차가워서 나는 슈트, 재킷의 깃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