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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독서 : 니체읽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1

by 에스더esther

제 2부 : 제 2장. 방랑자와 그 그림자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는 동안

가졌던 궁금증은 왜? 도대체 니체는 기승전결의

짜임새 있는 글로 책을 내지 않고, 다소 산만할 수

있는 잠언 형식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니체를 잘 아는 철학자(이진우 교수)의 강연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평생, 니체를 괴롭혀 온 두통과 눈병 등 온갖 질병들로 인해 그는 집중적인 글쓰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깐, 잠깐씩 상태가 좋아질 때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사유가 가능했었고, 그 찰나의 순간들을 활용해 적은 메모나 짧은 글들이 모여서 바로 이

책에 실린 것과 같은 잠언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을 듣고나니 안타까우면서도 니체의 사유가 힘겹게 담긴 글들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니체가 제2부를 집필한 시기는 앞서 포스팅했던 제1부의 집필 시기와 약간의 시차가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쨋든 1885년에서 1888년

사이에 1부와 2부가 쓰여지고 연결 되었다. 이제

그 피날레라고 할 수 있는 제2부의 두 번째 장을

만난다. 한편으로, 묘하게 아쉬운 마음도 다.


첫 구절부터 연극무대의 서막처럼 흥미로운 등장

인물들이 나타난다. 찰떡궁합 대사를 주거니 하고,

받거니 하는 '그림자'와 '방랑자'가 그 주인공이다.

그림자 : 오랫동안 네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너에게 한번 기회를 주고 싶다.

방랑자 :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군.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누구란 말인가? 마치 내
자신이 지껄이는 것을 듣는 것 같은데 다만
내 목소리보다 더 작은것 같군.

그림자 : (잠시 있다가) 이야기할 기회를
얻어 기쁘지 않은가?

방랑자 : 신과 내가 믿지 않는 모든 것에
맹세하지만 놀랍게도 내 그림자가 지껄
이는군. 내게는 그것이 들리지만 믿지는
못 하겠어.

(p.452중에서)

결국, 그림자는 방랑자의 것이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다름 아닌것

이다. 방랑자는 그림자에게 고백처럼 읊조린다.


"나의 친애하는 그림자여, 내가 그대에게 얼마나

무례했는지를 이제야 알았다. 그대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대 목소리까지 듣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군. 내가 빛을

사랑하듯이 그림자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기 바라.,,,(p.453)


이에 대한 화답으로 그림자도 방랑자를 향하여

하고 싶은 말을 건넨다.


"나 또한 네가 싫어하는 것과 똑같이 밤이 싫어.

나는 인간들이 빛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 또한 지칠 줄 모르는 인식자와 발견자

들인 그들이 인식하고 발견할 때 그들의 눈에

반짝이는 빛이 나를 기쁘게 하지. 인식의 햇살이

비칠 때 모든 사물이 나타내 보여주는 그림자,

그 그림자 또한 나이기도 해." (p.453)


이들 커플의 대화는 티키타카처럼 리드미컬하게

지면을 채워 나간다. 진짜,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식에 대한

아포리즘은 의지의 자유에 대한 발견이기도 하다.

의지의 자유에 대한 이론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 '필연성'은 어떤 사람에게는 정열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듣고 복종하는
습관으로, 또 어떤 사람에게는 논리적인 양심
으로,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변덕과 탈선의
방종한 쾌감으로 군림한다.,,,

그것은 확실히 누구나 자기의 '생명감'이 가장
강할 때, 즉 이미 말한 것처럼 어떤 자는 정열
에서, 어떤 자는 의무에서, 어떤 자는 인식에서
, 또 어떤 자는 방종함에서 자기가 가장 자유롭
다고 느끼기 때문이다.,,,(p.459중에서)

이쯤 되면,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그는 '인간 의지의 자유'를 인식하고

발견하는 것에 대한 영감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좀 더 방랑자의 시선으로 접근해 본다.


인간의식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시선을 끌었던 이야기는 다름아닌 새로운

배우라는 주제로 태어남과 죽음을 대입한 것이다.


"인간 사이에서 죽음보다 더 낡아빠진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진부한 것은 태어남이다.

왜냐하면 반드시 죽은 자 모두가 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결혼이다. 그러나

이제 싫증날 정도로 공연 되어온 이들 자잘한

희비극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자주 되풀이

해서 새로운 배우에 의해서 상연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흥미를 느끼는 관객을 붙들고 있다.,,,"

(p.489중에서)


마치, 인생의 순환 과정을 연극이라는 무대로 압축

해서 표현한 듯하다. 어쩌면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연극은 니체철학의 진수인 '영원회귀' 사상과 매우

밀착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터키인의 운명론'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는, 니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주제인 'Amor Fati' 라는 절대 절명의 운명론이 감지된다. '운명애'라고도 번역

되는 이 말은 '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

기도 하지만, 결코 수동적인 운명애가 아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부딪치는 주인공으로서의 운명철학이

니체의 본심이다. 터키인의 체념적 운명론이 아닌.

터키인의 운명론은 인간과 운명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것으로 대립하는 근본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운명에 대해 그것이 하려고 하는 바가 좌절
되도록 저항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결국은
언제나 운명이 승리를 거둔다. 그렇기 때문에
체념하거나 제 멋대로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
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인간도 그 자체로 하나의 운명이다. 비록 인간이 위에서 말한
방법으로 운명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더
라도, 이 일 자체 속에 운명이 성취되는 것 이다. (p.490중에서)

'Amor Fati(운명애)'의 적극적 운명론이야말로, 내가 니체에게 폭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음을

고백한다. 운명을 주어진 대로 받아 들이고 그저, 그렇게 체념하는 것은 결코, 니체답지 못하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라고 구호를 외치며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그에게서 나온다. 그러니 어찌, 이 부분에서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큰

소리로 유행가 선율에 맞춰 춤이라도 출 판이다.


"산다는 게 다 그런거지,

누구나 빈 손으로 와

소설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김연자의 노래중에서)


니체에게 유행가 공로상이라도 줘야하지 않을까

싶은 곡이다. 우리의 삶에는 이미 니체의 철학이

깊숙하게 체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터키인의 운명론, 다음에 나오는 잠언들은 주로

종교와 신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아직까지는 좀

소화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니체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 않았다는 것.

그의 말년에는 고통 중에도 '광기의 메모'로 남긴

글 중에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로 서명한 것도

있다고 하니, 그는 '신을 사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장의 후반부는 작가와 작품론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특히, 괴테를 언급한 부분이 가장 많은 걸

보면 니체가 괴테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견고한 간결함, 안락함, 성숙함'등의 비유

속에서 은근히 괴테를 대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산문의 보배'라고 칭할 정도다.


한편, 니체는 바흐나 헨델 및 하이든은 물론이고,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베르트 및 멘델스존, 쇼팽과 슈만 등의 음악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바흐'에 대한 글을 보자.

바흐의 음악을 대위법과 모든 종류의 푸가 양식의 완전하고 빈틈없는 전문가로서 듣지
'않는'한, 즉 본래의 음악적 기교면의 감상 없이 듣는 한, 그의 음악의 청중으로서(괴테의
장엄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우리는 '신이
세계를 창조한' 자리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그러나 바흐에게도 아직
많은 미숙한 그리스도 정신과 설익은 독일
정신과 서툰 스콜라 철학이 있었다. 그는
유럽(근대) 음악의 입구에 서 있기는 하지만,
그 곳에서 중세 쪽을 뒤돌아 보는 것이다.
(p.523중에서)

니체가 음악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눈치 챌 수

있는 부분이다.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스스로의 음악을 만든 적도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 니체가 만든 음악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시들했었다고 전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모든 예술적 분야와 정치, 문화, 국가론 등을 섭렵하여 적어 내려간 니체는 인생의 나이를 사계절에 비교하여 사색 하기도 했다.


"사계절을 인생의 네 시기에 비교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인생의 첫 20년과 또 마지막 20년은 어느 계절에도 대응하지 않는다.,,,,,,


첫 20년은 삶의 전반, 즉 일생의 준비기간인 하나의 긴 설날에 해당된다. 또 마지막 20년은

앞서 체험한 모든 것을 전망하고 내면화하고,

종합하고 조화롭게 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이 중간에는 실제로 사계절과의 비교를

시사하는 시간이 끼여 있다. 즉 20세부터 50세

까지의 기간이다.,,,20대가 인생의 여름이다.

이에 반해서 30대는 인생의 봄이다.,,,40대는

정지하는 모든 것처럼 신비로운 시기,,,이것이

인생의 가을이다."(p.572중에서)


니체는 인생의 사계절 중에서 겨울은 없다고 한다. '이따금 끼어드는 괴롭고 싸늘하고 고독하면서도,

희망 없는 시간을 겨울이라고 부른다면 모르겠다' 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어쨌든 니체에 의하면 우리의 인생에는 추운 겨울이 없는 것이다.


이제 드디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담긴

니체의 사유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한다. 처음,

이 장을 시작할 때 등장했던 방랑자와 그림자가

다시 나와 마무리를 장식한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을 니체와의 데이트를 그들의 대화로

마무리 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은 듯 싶다.

방랑자 : 그런데 내가 급히 서둘러서 그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는 없을까?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그림자 :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저 철학자의
개(디오게네스를 말함)가 알렉산더 대왕 앞
에서 바란 것 말고는. 나에게 햇빛이 비치게
조금만 비켜 줘. 몹시 춥군.

방랑자 :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림자 : 그 전나무 사이에 들어가 산을 바라 봐 달란 말이지. 해가 저물고 있어.

방랑자 :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
버렸는가? (p.602~604중에서)

책은 마무리를 맺었는데, 뜬금없이 또 다른 서문이

첨부되어 있다. 아무래도 이렇게 이별하기에는 꽤

아쉬운 모양이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도중에

읽어야 할 여행안내'라는 제목의 서문을 통해 다시

그를 만나봐야 겠다. 아직 할 말이 남은 니체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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