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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하여

Notes on Suicide

by 에스더esther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오후


by 사이먼 크리츨리 (변진경 옮김)

Q. 자살은 잘못된 것인가?
[자살에 대하여]를 쓴 목적은 단순했다.

자살을 자유로운 행위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두면서 그런 생각을 표현하는

어휘를 가능한 한 확장하는 것이었다.


자살이라는 주제는 강한 반발을 부르면서도

실은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종류의

여지를 찾기 위해서는 다소 준비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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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잘못된 것으로서,

그 질문을 제기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정신은 잊어버린 더러운 도덕적

세탁물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회의, 자기혐오,

자기연민의 서랍을 뒤지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극단적인 폭력행위로 삶을 포기

하지 않고, 삶을 다정하게, 주의깊게 볼 수가

있도록 삶을 정지해 있게 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계속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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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자살에 대하여]는 2014년 11월 서퍽

해안에 있는 올드러버의 브룬델 호텔에서 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매우 이상해 보이는

행동이다. (사실 코로나19가 성행하는 여름,

뉴욕에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는 어디든

가는게 이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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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나는 자살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부분적으로는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이미

어느정도 말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 주제가 청중들에게서 유발

할 수 있는 이상하고 매력적인 에너지가 조금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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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복잡한 생명체다. 우리가 때로 삶을

끝내기로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 논의할 때는

왜 그 복잡성을 박탈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2020년 8월 부르클린에서 쓴 작가의 서문)


작가의 서문이 하고픈 말을 다 한듯 싶다.

서문이 끝나고 시작된 첫 멘트는 '이 책은

자살 유서가 아니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까봐 걱정한다.

왜냐하면 작가 자신은 자살할 계획도 없고,

자살을 반대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대신 작가는 자살에 대하여 더 성숙하고도

관대하며 성찰적인 논의가 절실히 필요함을

강조한다. 용기를 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Q. 자살은 왜 비도덕적이라 여겨지는가?
근대와 고대에서 자살을 보는 관점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플라톤은 자살을 불명예라고
간주했지만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사법적 질서로 인한 자기살인의 경우, 중요한
예외로 받아 들였다. 철학의 실천은, 따라서
자살로 시작한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철학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p.48중에서)

작가는 철학자이다. 어느 날 그는 '죽음학교'를

만들어 '자살유서' 쓰기 수업을 한다. 영국의

'인생학교'에 은근한 도전장을 던진거라고도

거침없이 말한다. 유서들은 창작 글쓰기의 수업

으로 분류 되기도 하지만, 그 수업으로 인해서

작가는 "역겨운 인간"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닿았던 부분을 소개할

차례이다. 바로 나의 최애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에게 남긴 유서에 관한 대목이다.


나는 더 이상 고통과 싸울 수 없어.
내가 당신 인생을 망치고 있다는걸 알아.
(.....)이제는 이것조차 제대로 쓸 수 없어.
읽을 수도 없어. 내 인생에서 누린 행복은
모두 당신 덕분이었다고 말하고 싶어

(p.137중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 주머니에 돌을 잔뜩

넣은 채 집 근처 강에 투신했다. 신경쇠약 증세로

고통을 겪던 울프의 고통스런(?) 선택이었다.


작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이 갖는 이유들에

대해 연연해 하지는 않는다. 울프의 삶에 의미를

갖는 것은 자살이 아니라 그녀의 작품에 담겨진

용기와 삶에 대하여 쓰여진 많은 것들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인

<등대로( To the Lighthoyse)>의 아름다운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 마무리를 하고 있다.


언제나, 하고 램지 부인은 생각했다. 어떠한
사소한 것 때문에, 무언가 보이거나 들려서
어쩔 수 없이 고독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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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밤중에 깨어 나면 그 불빛이 바닥을 거쳐 침대 쪽으로 휘어진
것이 보였다)불빛을 보았다. 그런 생각에도 불구
하고 그는 매혹되고 홀린 채 불빛을 바라 보면서,
마치 그것이 은빛 손가락으로 그의 머릿 속에
밀봉된 무언가를 어루만져, 무언가가 터져서 기쁨으로 넘친 듯이, 행복, 아름다운 행복, 강렬한 행복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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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굽이치고 부풀어 해변에서 부서졌고,
그의 눈 속에는 황홀감이 솟아 오르면서 순수한
기쁨의 파도가 마음의 바닥에서 질주했다. 그는
느꼈다. 이것으로 충분해! 이것으로 충분해!

(p.138~139중에서)

울프의 글 속에서 작가는 일상의 작은 기적을 발견

한다. 삶은 여기 정지해 있으며, 그 무심함에 우리

자신을 부드럽게 열어둘 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은 지속되고 충분해 진다는 것이다.

11월 말 목요일 오후 4시30분 무렵, 회색 구름과 갈매기, 돌풍이 있는 가운데 광활한
어둠이 내려오는 이스트앵글리아 해변에서의
이 순간은 백만 번 중 한 번, 수억 번 중 한 번
일어난다. 여기에 기쁨이 있다. 여기서 스스로
고독에서 빠져나와, '쐐기 모양을 한 어둠의
핵심'인 자아에서 벗어나 다른 것에 손을 뻗을
수 있다. 사랑 안에서......!

우리의 눈 속에서 황홀감이 솟아 오른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2014년 말, 어느 날
영국 올드버러에서.(p.140~141중에서)

책의 제목은 '자살에 대하여'로 시작 했지만.

책의 말미는 '삶의 지속성'으로 끝을 맺는다.

나름의 반전을 갖는 작가의 결말이 시나브로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 '충분하다'.

p.s.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자살에 대하여'와 하미나 작가의 해제는 나름대로

책의 이해를 도와 주고 있다. 특히, 논픽션 작가로 2030 여성의 우울증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하미나 작가의 시선을 통해 '삶을 끝낸 이들조차도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에 쓰여져 있는 '옮긴이의 말'대로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는 얄팍한 말로 덮어 버리는 세상의 잣대에 알게 모르게 동조해 왔던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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