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일상] sync next 25 <루시드폴 x 정마리 x 부지현>
요즘 난 잘 듣고 싶다. 전에는 잘 말하고 싶었다. 내 의도를 왜곡 없이 충분히 잘 전달하는 것이 내 목표였다. 대화할 때 내 말을 잘 들었을까? 혹시나 오해하고 나를 나쁘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요즘은 잘 듣고 싶다. 그 속뜻을, 그 의도를, 내가 알아내고 싶다. 당시에 의도를 모르고 그냥 허허실실 그렇다고 괜찮다고 한 내가 싫고 이후에 이 가시를 내 여린 마음바닥에 굴리고 있는 이 상황이 서글프다.
그래서 난 요즘 잘 듣고 싶다. 보는 것은 외부를 인지하는 과정이라면, 듣는 것은 나를 인지하는 과정이다. 들음으로써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멀리,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
주체적 듣기가 가능한 공연이라기에 이번 공연을 선택했다. 그리고 당일엔 180분 러닝타임이 지쳐 집에 돌았갔다. 그럼 데 오히려 그다음 날 공연이 더 좋아질 수도 있네? 마치 다음날 한번 더 끓인 김치찌개나 카레처럼. 오히려 자기 전, 갑자기 들었던 소리가 생각나고 어제의 긴 시간이 하나의 덩어리로 압축되는 경험을 했다.
음악의 기승전결로 관객을 끌고 가는 것이 인위적인 몰입이라는 루시드폴의 생각에서 시작된 이 공연은 관객이 스스로 널브러져 눕거나 앉거나 서서 주체가 되어 헤엄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러닝타임이 길어서 조금은 끌려간 것 같기도..)
부지현 님의 작품들은 물고기 같기도, 물고기 잡는 배 위에 등 같기도 하고, 심해 물고기 같기도 하고, 어찌 됐건 바다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크고 넓은 꿈같기도 하고… 좋은 건 작가의 의도와 관객의 해석이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는 점이다.
10여 분간 레이저로 만든 가상의 층과 방을 만져보고 뚫어 보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찔러보고 막아 보고 움직여 보고. 서사는 없고 우리만 존재했다.
서사가 없는 3시간은 정말 쉽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관객이 이탈했다. 나도 위기가 왔던 때가 2시간 30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시간이 2시간 30분이 지났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게 몰입의 요소다. 시간감각이 흐트러지는 경험. 아주 빠르게 시간이 흐른 듯한 기분. 음악이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잠에 들었다가 안 들었다가 몽롱해졌다가 총명해졌다가 흐릿해졌다가 명료해졌다가 낮아졌다가 높아졌다가. 각자의 리듬을 갖고 흐를 수 있었던 공간과 시간이었다.
그러나 음악에서 루시드폴과 정마리는 각자의 음악을 했지 하나의 음악이 아니었다. 루시드폴의 테이프 루프가 신기했지만, 정확히 지금 어떤 과정이 진행되고 있고 그래서 지금 들리는 소리에 변화를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그저 소리소문 없이 변화하고 변화하고 변화했다.
오히려 정가가 여기에 콜라보하게 된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단지 국악이라는 이유때문이었을까? 탈장르를 지향하는 국악 아티스트라는 정체성 때문이었을까? 이 공연을 본 관객들은 정가를 어떻게 경험하게 될까? 너무 단편적인 경험이 되진 않을까? 여창가곡의 그 고요한 화려함을 알아차렸을까?
제작극장 세종에게 묻고 싶다. 이 세명의 아티스트가 필요했던 이유를. 무엇이 그대들의 목적이었는지...
공연을 제작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질문을 던져본다.
다만 혼자 놀란 건 3시간 엠비언트 사운드 관객이 내 예상보다 많다는 것.
역시 관객은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어린이도 3시간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놀며 관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듣는다는 것.
모든 걸 듣는다는 것.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