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술 취한 새내기
1995년도 입시에서는 아직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자리를 잡지 않았다.
1996학년도 신입생은 학력고사에 맞춰 길들여진 교사들에게 배웠으므로
수능준비가 미흡하였다.
모의고사도 그때그때 양상이 달아서 교사들도
종잡을 수 없어 헤매었다.
나는 원래 단순암기보다는 이해가 되어야 재미가 있었고,
수학은 진작에 포기했으므로 국어와 영어에 집중했다.
수능 점수는 좋지 않았으나 다른 동년배들이 더 점수가 낮아서
어찌어찌 국립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96학번이었다. 나는 재수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성적에 맞춰서 평소 내가 좋아하는 어학 쪽이 아니라
교사가 되기 위해 일사교육과로 진학하였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도 일사교육과가
일본역사를 배우는 곳으로 알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 등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고
관심 없는 과목을 배우게 될 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대학 시절이 달라졌을까.
5월의 캠퍼스는 푸르디푸른 나무들로 물결을 쳤다.
산을 가로질러 오래된 건물들이 고풍스러운 곳도 있었고,
박물관도 있었고, 캠퍼스 중앙엔 골짜기가 있어서
물이 많으면 물놀이까지 가능했다.
골짜기 주변엔 동문들이 의자를 깔아놓고
각기 자신들의 둥지를 만들었다.
정치학개론 시간에 나는 처참히 무너졌다.
교수가 다짜고짜 우리나라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뭔가 주워들은 것은 많아서
대충 '을사조약'이라고 답했다.
"아니 어디 그래 무식해 가지고 이 학교를 들어왔는가, 자네?"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전공과목에 대한 흥미를 잃고 말았다.
1876년도 강화도 조약이 우리나라의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라는 것쯤은
일사교육과에 들어온 학생들은 알았어야 했다.
나는 꿈에 부풀어 대학교에 들어왔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달라서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
과 학생수라고 해봐야 20명에다 남자비율 맞추려
허가해 준 3명의 남학생이 있고,
2학년, 3학년, 4학년도 마찬가지라 남학생이 한 두 명에다
그나마도 경쟁이 치열하여 이미 다 짝이 있었다.
나는 3월 입학부터 동아리니 동문이니 모집하느라고
시끌벅적한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다.
무슨 토론 동아리는 가봤더니
토론은 고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술 마시는 모임이었다.
동문은 광안여고와 멀리 떨어진 낙동고가 함께
했는데, 남학생들은 주로 기계공학과와 항공우주공학과와 전자공학과,
조선해양공학과 학생들이었다.
하나같이 좀 촌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영어회화동아리는 주로 대학교에 왔지만, 영어실력도 키우려는
현실성 있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매일 수업 시작 전 8시에
돌아가면서 뉴욕타임스 사설을 읽고 해석하였다.
재미있기도 하고 너무 어렵기도 했다.
1학년 학생들인데 영어를 너무 잘하니까
나는 내 차례가 돌아오기 전 지레 겁을 먹고 또 나와버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마음만 먹으면 매일같이 술을 마셔대는 통에
나는 술독에 빠진 쥐 꼴이 되었다.
레몬소주와 체리소주는
술 같지도 않고 달콤하고 향긋하고 색깔도 끝내주었다.
생맥주는 맛은 시큼하고 이상한데 얼얼하면서도 시원했고,
술도 술이지만 안주가 정말 맛있었다.
감자튀김, 노가리, 땅콩, 김치찌개, 제육볶음, 돈가스 등
나는 안주 킬러였다.
머리엔 나이에 맞지 않게 나비핀을 꽂거나,
아무도 하지 않는 헤어밴드를 하거나,
긴 빨간 치마를 입거나,
하얀 부츠에 검은 스커트를 입고
캠퍼스를 누볐다.
어디를 가나 나를 모두 귀여워해주니까
나는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다녔다.
처음엔 남자 친구라도 사귀어볼까 하는 마음에
살짝 긴장을 하고 잘 보이려고 애썼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하다가
오빠들이 넘실대는 대학교의 술자리 문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점심시간에 지나가다 아는 선배만 만나도 대개는
구내식당이나 학교 앞 정문 싸구려 식당에서 밥을 사주는 분위기였다.
아는 사람이 많았던 나는 무수히 많은 점심을 얻어먹고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5월 중순이 넘어가니
이러려고 대학교에 왔나 싶고,
후회도 아닌 것이 뭔가 허전하고 허무한 느낌이 밀려왔다.
그리고 선배들도 과외로 힘들게 번 돈으로
후배들 점심 사주느라
지쳤는지 캠퍼스에서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5월부터는 술자리에서 새내기도 어느 정도 술값을 부담하게 되었다.
술값도 은근히 많이 들었다.
그나마 무서운 아버지라서
귀가 시간이 10시는 넘기지 않았는데,
살짝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가는 그 길에서,
별은 총총 빛나고 머리는 어지럽고
'이래 살아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늦은 시간 대학교 앞 집에 가는 전철역에서
나는, 술이 떡이 되어 인사불성인 국민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그 아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두 남학생이 겨우겨우 지탱할 만큼
다리엔 힘이 풀려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친구가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너무 걱정이 되면서도 데려다줄 용기도 안 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학생들이 은근슬쩍
친구의 몸을 만지게 될 상황에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술자리에서 중간에 화장실에라도 가면
남녀가 구분 안되어 있는 곳도 많았고,
온갖 토사물과 엉켜 상상초월의 냄새를 풍겼다.
특히나 만취한 남녀가 제대로 뒤처리를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알코올이 분해되며 남긴 흔적은 끔찍했다.
어떻게든 술 취한 상황에서 어찌해 보려는
인간들을 보았고, 주사를 부리고 폭력을 쓰고
혀가 풀려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울고 떼쓰고
술이 취한 뒤의 테이블 위의 엉망진창인
그 상황을 바라보며 나는 혐오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가만 보니 다 잘해주는 것 같았지만
알게 모르게 제일 예쁜 애 주변으로만 남학생들이 몰렸다.
경쟁이 치열했다.
나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중심이 아니고 들러리가 되는 상황도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동문 엠티에 가서 제일 예쁜 명진이가 볼일 보느라 밤늦게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남학생들이 서로 택시를 태우네 마네 하면서
기싸움을 하며 난리를 치는 통에 나는 모든 상황 파악이 종료되었다.
술자리에서도 은근슬쩍 예쁜 애가 일어나면 눈치를 보다
남학생이 몇 명씩이나 서로 지하철역에 데려다주겠다고
싸움을 하였다. 물론 내가 집에 갈 때도
몇 명이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나는 그 상황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너무 난감했다.
잘생긴 정남이를 선택하면
못생긴 진교가 슬플 것 같고,
그렇다고 진교를 선택하기엔
영 기분이 안 나고 등등 골치 아픈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대학 입학 100일도 안되어 대학에 대한 흥미를 잃고 말았다.
얌전히 앉아서 공부만 할 줄 알았지,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정신을 못 차린 나 호영은,
그렇게 나는 환멸을 느끼면서도
끊어내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술에 취해 가고 있었다.
가끔은 스무 명이라 결석을 하면
대놓고 표가 나는데도
수업에 빠지기도 하고,
수업시간 중간에도 술 마시러 가고
노래방에 가고, 당구장에 가고, 영화방에 갔다.
한 잔에도 취하던 나는 몇 잔을 마셔도 끄떡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머잖아 대놓고 마시던 술은 경제적 상황 때문에라도 끊을 수밖에
없는 국가적 상황이 닥쳤으니,
그것은 1997년 IMF 경제 위기였다.
그리고 나는 안 마시던 술을 너무 마신 데다가,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어서 건강에 치명적이었다.
위가 안 좋아져서 온몸이 붓고 입술이 갈라지고 터지고
온 얼굴에 수포가 올라와서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었으니,
인생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빠른 치료부터 근원적으로 체질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동의대학교 한방병원에 가서 한약을 지어다 6개월을 먹었다.
회복은 더뎠지만, 약이 효과가 있었던지 서서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술을 완전히 끊었다.
술 취한 새내기 호영은은 그렇게 대학 생활에 적응을 해갔고,
제정신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