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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Jan 28. 2019

괜찮아, 사람이라서 외로운 거야

- 나란 무엇인가

나의 수상한 점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교 3학년 때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광주에서 1박을 더 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휴게소였다. 같은 과 여학생들이 우르르 화장실을 가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휴게실 구석에 동그마니 앉아있었다. 친구 경원이가 데리러 와서는 ‘너 가끔씩 이렇게 개인행동 하드라’고 꼬집었다. 4박 5일 내내 스무 명 넘는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는 일정에 지친 모양이다. 평소라면 학교에서 같이 있다 헤어진 후 다음날 캠퍼스 페르소나가 작동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무리 지어 있다 보니 혼자 있고 싶은 자아가 헤집고 나온 게다.    


 코사무이로 신혼여행을 갔다. 리조트에서 3박 하고 풀빌라에서 3박, 총 6박 7일의 황금휴가였다. 커피 세 잔에 블루베리 팬케익, 오믈렛에 망고까지 아침을 느긋하게 먹은 후  풀에서 수영하고 선탠하고 맥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갓 남편이 된 섹시한 연인이 온몸에 오일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 주니 이거야 말로 황홀과 충만의 완전체가 아닌가!


닷새 째 되던 날 울음이 터졌다. 그가 샤워하고 난 욕실에 헝클어진 타월과 너부러진 샤워기. 뽀득뽀득한 침대에 붙은 머리카락과 담배 냄새 같은 것들을 탓했지만 사실 남편과 24시간 함께 있는 것이 힘들었다. 혼자이고 싶은 나를 꺼내 줄 시간이 없었으니까.   


 어려서부터 나는 명랑하고 쾌활했다. 잘 웃고 말재주도 좋은 재간둥이였다. 목사 아버지의 삼 남매 중 외동딸로 교회 공동체에서 늘 주목을 받았다.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그런데, 중학교 이후 내 일기장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자주 등장했다. 이 외로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부모나 친구가 없어서, 사고 싶은 옷을 못 사서 생기는 쓸쓸함은 아니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 친구가 없어서’가 주요 원인이었다. 엄마가 아빠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사실을 중3 때 처음으로 알게 됐다. 로맨스 문고를 읽으며 달콤한 첫사랑을 꿈꾸던 열다섯 소녀는 엄마가 애 딸린 홀아비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하늘이 캄캄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나도 엄마처럼 연애 한번 못해 보고 노처녀로 늙을까 봐, 그러다가 ‘헌 남자’와 결혼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첫사랑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큰 바윗덩이에 와자작 거울 깨지듯 부서진 나의 로망.


스물아홉 살 연말에 처음으로 사주를 봤다. 사주 공부 좀 하신 어르신이 삼십 대 운세를 봐주겠다고 해서 재미 삼아 생년월일시를 알려드렸다. 내 사주는 ‘권권권고’라고 했다. 권력이 세 개나 있어 권력이 많이 따라붙는데 마지막 ‘고’는 외로움이라고. 결혼은 사십 넘어서 해야 잘 산다고 했다. 사춘기 때부터 외로움을 자주 느낀 게 타고 난 팔자였던 건가?


그 어르신 말씀이 예언이 된 것인지 마흔 넘어 결혼을 했다. 이십 대에 만났으면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을 캐릭터인데 “돌고 돌아 만나서 이렇게 살아가네”하며 남편과 웃곤 한다. 생각해 보면 사춘기 시절에 나 좋다는 남자애들이 제법 있었다. 연애편지도 많이 받고 오르지 못할 나무라 포기했다는 고백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방어막을 치고 다 튕겨냈다. 누가 무엇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외로움 보따리를 들러 메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도 있어 제법 행복한 지금도 ‘그 녀석’이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걸 보면, 외로움 페르소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인 모양이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면서 위풍당당, 카리스마 페르소나가 자랐다. 물 밑에서 버둥버둥하면서도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 페르소나도 함께 성장했다. 여자라서 얕잡혀 보이면 안 되니까, 밟히면 안 되니까, 뒤처지면 안 되니까 작동된 내 분인 들이다. 최근에는 분노 페르소나가 급성장했다. 10년 넘게 공을 들여도 성취하지 못한 꿈이 분노로 바뀌더니 젤리 몬스터처럼 꿀럭 꿀럭 부풀어 올랐다. 처음에는 혼자 있을 때만 기어 나오더니 이제는 가까운 사람과 있을 때 수시로 등장한다. 이 아이를 얼른 떠나보내고 싶은데 질기게도 붙어 있다. 그동안 외면하고 혹사시킨 대가라 생각하고 당분간 달래주려 한다.


글을 쓰며 내 안의 페르소나를 들여다보니 '이 아이들이 저마다 사연이 있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돌이켜 보면 사춘기 때 느낀 외로운 감정은 ‘존재적 외로움’이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만이 채울 수 있는 ‘영혼의 빈 구멍’ 말이다. 그 구멍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건 존재적 외로움을 느끼는 자아를 위로해 주고 싶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고백을 통한 자기 해방이라했던가. 이제 막 그 여정을 시작했다. 글쓰기로 ‘혼자 있고 싶은 나’를 토닥거리며 외로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 외로움을 동반자 삼아 글을 쓰며 외로운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떠날 녀석은 떠나고 편하게 같이 머물고 싶은 페르소나가 돋아나겠지.


외로워도 괜찮아.

사람이라서 외로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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