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뻔하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한 정신 스트레칭
'글 잘 쓰고 싶으면 현대미술관에 가세요'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쏙 들어왔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라는 책을 출간한 인기 칼럼니스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글쓰기 강연에서 말했다. 현대미술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 스트레칭이 된다고.
설 연휴 마지막 날을 집에서 뒹굴며 책을 읽을까 했는데, 오늘은 정신 스트레칭 좀 해줘야겠는걸. 우아하게 혼자 전시회 가고 싶은데 껌딱지 딸내미도 가고 싶다고 눈물이 핑그르르.
우야겠노, 이 영혼도 스트레칭이 필요한가 보네.
“망고, 예술의 전당에 에바 알머슨 전시 보러 가실래요?
공동육아 같이 하는 서율이 엄마 ‘열매’가 카톡을 보냈다(공동육아 조합원들은 서로 별명으로 부른다).
“우리 마침 과천 미술관 가려던 참인데... 여긴 오늘 입장료 무료예요. 돼지띠한테는 통합 초대권도 준다던데? “
“오오오 그럼 가야죠”
“에바 알머슨처럼 친근한 그림이 아니라...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뭐든 다 초보니 ㅎㅎ”
“그럼 일단 한번 경험해 보는 걸루~~ 2시부터 아시아 현대 미술 도슨트 투어 있어요. 전시 보고 카페에서 고르곤졸라 피자 먹자. 우린 거기 가면 그거 꼭 먹고 오거든^^ ”
망고, 열매 그리고 고구마까지 엄마 셋이 아이들 다섯 손 붙잡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나들이에 나섰다.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들은 뛰기 시작한다. 계단을 올라가면 야외 조각공원에 우뚝 서 있는 조형물이 끼잉 끼잉 소리를 내며 입을 움직이고 있다.
“얘들아,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내고 있네. 뭐라고 하는 걸까?”
“음, 저건 분명 한국말은 아냐. 다른 나라 말이야”
“아 그래? 근데 뭐라고 하는 것 같아?
“노래 부르는 것 같아”
“아, 노래하는 것 같구나. 무슨 노래일까?
“불교 노래하는 것 같아”
다음 달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현우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불경 읊는 소리와 비슷하다. 이 작품을 여러 번 봤는데, 심지어 딸내미랑 벤치에 앉아서 30분 넘게 바라본 적도 있건만... 불경 읊는 소리라! 새로운 발견일세.
“저 쪽에 호박 있어요”
“그래, 쿠사마 야요이 작품이야. 그 앞에 가서 사진 찍자.”
후다닥닥닥.
“자 이쁘게 여기 보고~~”
이 녀석들 여기 보기는커녕 호박을 핥고 아구 아구 먹는 시늉을 하고 있다.
“나는 호박을 다 파 먹을 테다, 흐흐흐”
열한 살 지우는 고개를 파묻고 물방울무늬 가득한 호박을 맛본다. 하여튼 사내 녀석들은 짓궂다니까.
“엄마, <다다익선>이 아직도 불이 꺼져 있어. 수리를 못하고 있대요.”
미술관 입구에 우뚝 선 백남준의 작품으로 다섯 살 때 처음 왔을 때부터 우리 딸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다다익선>의 1003개 TV 화면이 모두 꺼졌고 오늘도 역시 캄캄하다.
“응, 작품의 원형을 살리기 위해 제작 당시에 썼던 재료를 그대로 사용해서 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랑 그 재료를 구하기 어려우니까 시대상황에 맞게 다른 재료로 바꿔서 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대.”
“내 생각에는 두 번째 주장이 맞는 것 같아.”
“그래? 선인이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엄마 회사에도 백남준 작품이 있는데 불 꺼진 지 몇 년 됐어. 옛날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수리를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워.”
우리 딸은 불 꺼진 <다다익선>이나마 위에서 보고 싶다며 원형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미술관 입장 신고식이라도 하는 걸까. ‘백남준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얘들아, 2시부터 도슨트 투어니까 그전에 중앙 전시홀 한 바퀴 둘러보고 있어.”
중앙 전시홀에는 도록과 미술책들을 펼쳐놓고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전시를 해 놨다. 딸내미는 도록을 훑어 보나 했더니 바로 핸드폰으로 시선이 넘어가는데, 지우는 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는 걸까? 아시아 각국의 정치, 사회적 사건을 연대별로 기록해 놓은 연대기표를 천천히 걸으며 들여다보는 모습이 전시회 좀 다녀본 듯 폼이 난다.
딸아이 두 살 때 혼자서 스위스 출장을 갔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프랑크푸르트행 기차 시간의 여유가 있어 역 바로 옆에 있는 스위스 국립 박물관에 들렀다. ‘ㅁ’ 자 건물의 동선을 따라 조형물들을 어찌나 입체적으로 배치했는지 스위스의 오래된 화폐, 시계, 초상화, 패션 등을 시간의 흐름 따라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지루하기 십상인 박물관을 어쩜 이렇게 흥미로운 공간으로 만들었을까 연신 감탄하며. 시계 모양으로 돌아가는 둥근 조형물 옆에 커다란 이층 미끄럼틀이 있고 여기서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며 놀이터 마냥 뛰어노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여기 애들은 박물관에서 뛰어노네. 우리 딸도 이렇게 박물관에서 놀면 참 좋겠다. 역사와 스토리가 가득한 공간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박물관이 참 부러웠다. 지금 이렇게 현대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편안하게 머물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세상에 눈뜨다 :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 – 1990s 』 전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년 동안 아시아 각국에서 진행된 사회, 정치, 문화적인 변화를 현대 미술이 어떻게 반영해 왔는지 조명하는 국제 기획전이다.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싱가포르, 필리핀 등 13개국의 작가 100여 명의 작품 170점이 선보였다.
도입부에 전시된 인도네시아 작가 F.X. 하르소노의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가 먼저 시선을 잡았다. 딸기 웨하스처럼 생긴 분홍색 크래커 권총이 잔뜩 쌓여있고 그 옆에 책상과 공책이 놓여있었다. 군사정권 당시 반대 입장에 있었던 F.X 하르노는 총 모양의 크래커를 직접 디자인해서 이 안에 옥수수알 2개를 넣었다. 작품 제목과 동일한 질문을 관람객들에게 던지고, 관람객들은 공책에 각자의 답변을 쓰면서 전시의 일부로 참여할 수 있게 열어놓았다. 딸내미가 냉큼 책상에 앉아 그림까지 그려가며 뭔가를 끄적거린다. 힐끔 내려다 보니, 내가 싫어하는 누구누구를 쏘고 싶다고 적었다. 에구머니나...
탈식민, 이념 대립, 베트남 전쟁 등 아시아의 사회 변화를 반영한 현대미술 작품들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텐데 아이들은 어쩐 일인지 작품 해설을 열심히 들었다. 도슨트 바로 앞에 코를 대다시피 붙은 지우의 집중력은 50분 투어 내내 흐트러짐이 없어 입이 딱 벌어졌다.
“이런, 카페가 문을 닫았네. 공사 중 이래. 피자 못 먹어서 어째...”
“그럼 선바위역 가서 육칼 먹어요~~”
육개장 집도 문을 닫은 바람에 막국수 식당에 가서 명태채 보쌈에 들깨 막국수, 해물파전까지 푸짐하게 먹고 놀이터에서 땀이 나도록 뛰어놀았다.
“지우야, 너 작품 해설 열심히 듣던데 오늘 어떤 작품이 생각나?”
“음... 모르겠는데요.”
“모르겠다고? 도슨트 아줌마 바로 앞에서 열심히 들었잖아. 기억나는 작품 하나도 없어?”
“없는데요...”
“아 그렇구나 흐흐”
기억나는 작품이 없으면 어떠니. 미술관을 놀이터처럼 생각하고 즐겁게 놀았으니 됐어. 아트 숍에서 득템한 카멜레온 볼펜 하나씩 손가락에 말고 휘휘 돌리면서 신났지? 오늘 미술관 나들이 재밌었다고 기억하면 돼지 뭐.
망고는 너희들 덕분에 정신 스트레칭 제대로 했단다.
우리 다음에 미술관 또 같이 가자,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