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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Mar 01. 2019

잊을 수 없는 사랑을 준 사람

-레이먼드 서튼을 추억하며


테네시주 녹스빌에서 유학하던 시절, 캠퍼스 감리교회 건물에서 일 년을 살았다. 기숙사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을 내고 살면서 잔디 깍기, 예배 후 점심 서빙 등 소소한 교회 업무를  돕는 공동체 생활이었다. 레게머리에 소울 무브가 환상적인 케냐 출신 Kathy가 내 룸메이트였다. 페루에서 온 Ruben, 홍콩 출신 Linda, 미국 친구 Allen 등 일곱 명이 방 세 개와 부엌을 나눠 썼다.  한 평쯤 되는 작은 부엌에서 토스트나 시리얼로 아침을 먹었다. 점심은 일본 그로서리에서 사 온 ‘이찌방 라면’을 커피 포트에 끓여서 오이 피클과 함께 먹곤 했다. 간식으로 당근 스틱과 Fat-free 프레즐을 야금야금 씹어 먹던 시절이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웬 할아버지가 사과 한 자루를 메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4H클럽에서 청년 농업인을 육성하다가 은퇴한 레이먼드 서튼. 그가 농사지은 사과는 작지만 싱싱했다. 한입 가득 새빨간 사과를 아삭 깨물었다. 그 후로 레이몬드는 주말마다 사과, 토마토, 수제 쿠키 등 먹을 것을 날랐다.  


추수감사절에 그는 학교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뉴포트의 자택으로 유학생들을 초대했다. 기숙사 문이 닫히는 기간에 오갈 데 없는 유학생들이 편하게 놀다 가라는 취지였다. 모미, 노리코, 요시오 등 일본 유학생들과 순복, 현주, 안나 등 한국 유학생. 남미와 중동에서 온 유학생까지 스무 명 남짓 그의 집에 모였다. 레이먼드의 아내 캐서린은 칠면조 구이와 크랜베리 소스, 비스킷과 햄구이, 그린빈 등으로 식탁을 가득 채웠다. 옆집 케이트 아줌마가 직접 구운 애플파이와 수제 쵸코렛이 디저트로 나왔다. 풍성한 추수감사절 오찬은 고향을 멀리 떠나 온 유학생들의 위장을 따듯하게 덮었다. 



점심을 먹은 후 대부분 돌아갔지만 나를 비롯한 서너 명의 여학생들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묵었다. 레이먼드의 집은 미국 남부의 흔한 이층 집이었지만 내부는 인테리어 잡지에 실릴만큼 아름다운 '컨트리 스타일'이었다. 눈부신 레이스 커튼이 달린 방에서 알록달록한 퀼트 이불을 덮고 쾌적한 밤을 보냈다. 외갓집에서 여름 방학을 보내던 어린 시절처럼 푸근한 밤이었다. 


이튿날 레이먼드는 우리를 ‘헤이라이드(hayride)’에 데리고 갔다. 건초가 잔뜩 쌓인 트럭 뒤 칸에 앉아 집집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클로스 장식에 조명을 밝힌 마을을 구경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보기에 테네시 시골 풍경이 하도 소박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풍기며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레이먼드의 정성이 감동적이었다. 조금 귀엽기까지 했다. 남부 사투리가 심한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귀를 기울이며 맞장구를 쳤다. 싹싹하게 반응하니 그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이듬해 대학원에 진학하며 오하이오주로 이사를 했다. 첫 학기 추수감사절에 레이먼드가 뉴포트로 놀러 오라고 했지만, 차가 없어 갈 수가 없었다. 레이먼드는 Newport에서 내가 사는 Athens까지 왕복 8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왔다. 아침 6시에 출발해서 나를 태우고 다시 테네시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우리는 매시 포테이토와 그레이비, 치킨으로 점심을 먹었다. 고속도로에서조차 지정속도 60마일을 절대 넘지 않는 레이먼드 덕분에 오후 늦게야 집에 도착했다. 레이먼드가 캐서린을 살짝 안으며 ‘How was your day?' 하고 이마에 쪽 뽀뽀를 했다. 캐서린은 ‘Lonely'하며 수줍게 웃었다. 



레이먼드 집에서 3박 4일을 묵으며 추수감사절 휴가를 즐겼다. 테네시주에 있을 때 사귀었던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그곳에 다시 오니 마음이 번잡했다. 레이먼드와 호숫가를 산책하며 댄스파티에서 데낄라를 마시고 넘어진 얘기, 최근에 헤어진 남자 친구 얘기를 했더니 ‘세상 남자는 아빠 빼고는 믿지 말라’고 했다. 외가와 친가 모두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사랑을 모르고 컸는데, 그날 레이몬드가 가족같이 느껴졌다. 그는 왕복 여덟 시간의 거리를 다시 운전해서 기숙사에 내려주고 테네시로 돌아갔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레이먼드는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다. 캐서린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 카드에 친필로 ‘Merry Christmas'와 'We love you'라고 적어 한 해도 빠짐없이 성탄 인사를 챙겼다. 그는 페루에 가서 루벤을 만나고 일본에 가서 모미를 만나는 등 이전에 인연을 맺은 유학생들을 찾아 전 세계로 여행을 다녔다. 한국에도 꼭 오시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임신 4개월이었을 때 드디어 그가 도착했다. 15년 만의 만남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분당의 한 식당으로 달려갔는데, 레이먼드가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났다. 서울에 도착하던 날 넘어져서 이마가 깨졌단다. 여든 넘은 할아버지에게 장거리 비행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 남편이 준비한 스파게티 3종 세트 점심을 먹고 이천 설봉공원에 갔다. 레이먼드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야외 조각 공원을 산책했다. 그의 말수는 한결 줄었고 걸음도 느릿한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한국에서 특별한 추억을 남겨드리고 싶어 도예가 임의섭 작가의 작업장을 찾았다. 물레 차는 모습과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함께 바라봤다. 그곳에서 나는 캐서린에게 보낼 선물로 붉은 매화가 그려진 청회색 접시를 골랐다. 레이먼드는 캐서린이 손수 뜨개질한 빨간색 숄과 베이지색 목도리를 내게 선물로 남기고 떠났다.





5년 전, 레이먼드의 아들 Steve Sutton이 페이스북에 부모님의 결혼 67주년 기사를 포스팅했다. 뉴포트 지역 신문이 밸런타인데이 특집으로 레이먼드와 캐서린의 장구한 결혼 생활을 취재한 것이다. 세상에, 67년을 함께 살다니! 26년 전에 그들을 처음 만났고 3년쯤 가까이 지냈는데 단 한 번도 인상 찌푸리거나 목소리 커지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잔잔한 목소리와 은은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했다. 말이나 행동이 서두르거나 흥분한 것을 보지 못했다. 딱 한 번, 한국 유학생 용미가 여덟 살 어린 흑인 남학생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레이먼드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 남학생은 용모도 훤칠하고 공부도 잘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 건실한 청년이었는데, 보수적인 백인 할아버지는 흑인에 대해 일말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용미의 결혼을 반대하는 의견을 얘기해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Steve Sutton의 페이스북을 찾아보니 캐서린 혼자 있는 사진이 보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레이먼드가 안 보이네. 2018년 4월 25일에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Steve는 당신은 우리에게 좋은 아빠, 좋은 롤모델이었다고 적었다. 레이먼드의 장례식은 뉴포트 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치렀다. 그와 함께 여러 번 예배드리고 점심도 먹었던 곳이다. 그의 부고 기사는 ‘테네시 주립대학교, 테네시 웨슬리안 칼리지, 히와시 칼리지, 테네시 메이지 가쿠인 고등학교의 외국인 학생들에게 집을 개방해서 ’Papa Sutton‘으로 알려졌다 “고 썼다. 


레이먼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줬다.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남미, 아시아, 아랍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유학생들 가슴속에 따듯한 기억을 심어 놓았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그의 추모 사진을 보니 외국인들과 찍은 사진이 참 많다. 나에게만 특별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나도 수백 명 중의 하나였음을 알게 됐다. 부고 기사가 말하듯 'He truly had friends around the world.


레이먼드 서튼, 당신 앞에 삼가 머리를 숙입니다.

받은 그 사랑 조금이나마 흘러가도록 

당신을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Love you, Raym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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