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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Jan 23. 2019

인생 뭐 있어, 당장 키스나 하자구!

- 30년이 지나도 <시네마 천국>은 여전히 인생영화


“알프레도~~~” 빵떡모자를 눌러쓴 토토가 광장 한가운데서 알프레도를 부른다. 허락도 없이 영사기에 손을 댔다가 불을 낼 뻔하고 쫓겨나던 참이다. <시네마 천국> 이층 영사실 창문으로 알프레도가 내다보자 토토가 “메롱이예요~~”하며 혀를 날름하고 도망친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초롱초롱한 까만 눈동자, 멜빵 반바지에 투박한 구두를 신은 여섯 살 토토는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는 귀염둥이다.


토토가 다니는 초등학교 국어 시험시간.

글을 못 읽는 알프레도와 동네 아저씨들이 검정 시험을 치러 교실에 들어온다. 시험지를 들여다보는 알프레도의 한숨이 깊어 간다.

애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지만, 토토는 빙글빙글 웃으며 시험지를 바싹 당겨 손으로 감춘다. “저 썩을 놈!”하고 욕설을 뱉어 보지만 알프레도의 입술만 타들어 갈 뿐. 토토가 수신호로 ‘영사기를 돌리게 해 달라’는 협상을 제시하고 알프레도가 마지못해 OK 하자 커닝 페이퍼를 휙 던져준다. 1940년대 후반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까막눈의 중년 아저씨 알프레도와 전쟁으로 아빠를 잃은 토토는 그렇게 친구가 된다.


<시네마 천국>을 처음 본 건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이었다. 감동의 여운이 묵직하게 남아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뭐였을까?


조각처럼 잘 생긴 청년 토토와 낭만적인 지중해의 풍광,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도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그토록 가슴을 적신 건 무엇이었을까?

그 이후로 수 백 편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건만 인생 영화를 꼽으라면 매번 <시네마 천국>을 떠 올리는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시네마 천국은 인생의 꿈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알프레도를 중심 화자로 두고 삶에 대한 메시지를 풀어나간다.

전쟁이 끝나고 3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빠와 홀로 삯바느질을 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그늘 아래서 토토는 재미와 모험으로 가득 찬 영화 속 세상을 동경한다.

아빠의 사망확인서에 서명을 하고 돌아오는 길, 엄마의 손을 잡고 폐허가 된 거리를 걷는 토토의 눈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 포스터가 들어온다. 허물어진 삶 속에서 <시네마 천국>은 토토가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공간이다.


어느 날 <시네마 천국>에 큰 불이 나서 건물이 모두 타버린다.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든 토토 덕분에 알프레도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시력을 잃고 만다. 청년이 된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극장을 떠나 학교에 가라고 말한다. 


‘넌 다른 일을 해야 돼. 중요한 일, 더 멋진 일, 인생을 걸 수 있는 일!’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인생이 ‘더 잘 보인다’고 하면서.

토토가 첫사랑 엘레나와 소식이 끊기고 일자리마저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알프레도는 시칠리아를 떠나라고 말한다.


“여긴 희망이 없다.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
로마로 가거라.
멀리서 네 명성만 듣고 싶구나.”




희망이 있는 곳으로 떠나라’는 20대 초반에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다. PD가 되고 싶은 열망을 품었던 그 시절에 두렵고 망망한 꿈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네마 천국>이 개봉되던 1988년, 올림픽 조정경기장에서 통역 봉사를 하며

소련과 폴란드에서 온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기 전이었기에 미지의 세계에서 온 그들과의 조우로 내 가슴은 쿵쾅거렸다.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북적북적 일주일을 보내면서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순풍에 돛을 달고 먼 바다로 항해하고 싶었다. 

지중해 너머 영화 속 세상을 꿈꾸던 토토처럼.






<시네마 천국>에서 사랑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겠지. 


“사랑은 막다른 골목 같은 거야. 파란 눈은 안 돼...”


알프레도가 영화 속 존 웨인의 대사를 빌어 말한다.

청년 토토가 금발의 엘레나에게 첫눈에 반하고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을 때다.

토토가 100일간 창밖에서 기다린 끝에 엘레나가 마침내 마음을 열고, 무더운 여름날처럼 둘의 사랑은 뜨겁게 타오른다. 한 여름밤에 야외 영화관으로 찾아온 엘레나와 토토의 소나기 키스는 헉... 숨을 멎게 한다.

청춘의 사랑은 질투하는 이가 많은가?

병무청의 실수로 토토가 군대에 끌려간 후 그녀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오고 대답 없는 첫사랑은 아프게 사라져 간다.


<시네마 천국>에는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영화를 보면서 찡긋 눈이 맞는 청춘남녀, 사람들 시선을 아랑곳 않고 과감하게 사랑을 나누는 커플, 영화 속 미녀들을 보며 손장난으로 성욕을 채우는 소년들까지.

영화의 극적인 순간마다 사전검열을 당한 키스신은 사라지고 ‘우우우~~~’ 관객들의 불만이 쏟아진다.

<뉴시네마 천국>이 개관하자 웬일인지 키스신이 잘리지 않고 생생하게 돌아간다.

‘정말 죽이는데 키스! 세상에 키스한다, 인생 뭐 있니!’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짝짝짝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그래 인생 뭐 있어, 당장 키스나 하자구!

KISS, KISS!!








1940년대 시칠리아의 광장과 극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2019년 서울에 사는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다. 술을 마시며, 아기 젖을 물린 채로, 담배꽁초를 몰래 빨며 영화를 보는 사람들.

때로 함성을 지르고 야유를 보내며 고단한 삶을 잊고 싶은 사람들. 알프레도는 마술사처럼 영사기를 돌리며 스크린 속으로 그들을 인도한다.

관객이 몰려 미처 극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을 외우며

광장 건너편 벽으로 스크린을 옮겨준다.

‘브라보 알프레도, 완전 멋져요, 고마워요 알프레도!’ 사람들이 환호하자 

“빌어먹을 영화 타령은...” 하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으리라.

우리도 이런 위안과 기쁨을 찾고 있다.

고단한 인생을 잠시 잊고 환호할 수 있는 마술 같은 순간을!


‘산다는 건 영화랑 다르다. 사는 게 훨씬 더 힘들다’고 알프레도는 말한다.

힘들어도 삶은 지속된다. 스무 살 때와 지금 나의 심장 박동수는 다르지만, 체온은 여전히 36.5도다. 쓴맛, 신맛을 두루 경험한 중년에도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은 남아있다.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광장에서 한바탕 웃고 싶다. 


“마지막에 뭘 하든 그걸 꼭 사랑하고,
철부지 시절
영사기를 잡던 토토를
꼭 기억하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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