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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Oct 22. 2019

감성이 메말랐을 때 낯선 장소에 가보기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한때 담배 100억 개비를 생산하다 폐건물로 방치되었던 연초제조창이 복합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곳, 문화제조창C에서 열리는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에 초대를 받았다.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지만, 중학교 사회 시간에 ‘교육도시’로 암기했던 기억 외에는 경험치가 없는 낯선 도시다. 국내 3대 비엔날레를 꼽자면 부산·광주·청주라는데 몇 해 전 광주비엔날레에 한 번 갔다 실망한 터라, 별 기대감 없이 가족여행 삼아 바람 쐬러 떠났다.


“엄마. 여기도 우암초등학교가 있어!”

“그러게. 우리 딸 학교랑 똑같은 이름이네.”


청주시 북쪽 우암산 자락 한가한 동네. 한 때 3천 명이 넘는 근로자가 일하며 솔, 라일락, 장미 등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담배를 생산하던 그곳에 단정한 흰색 건물이 담담히 앉아있다. 광장 초입에는 흙을 사각 탑처럼 쌓아 올린 웅장한 도자조각이 서 있고, 잔디밭 한쪽에는 도자 탁자들이 오종종 앉아 있다.


딸아이는 킥보드를 꺼내 가을 햇살이 가득한 광장을 씽씽 가로질렀다. 남편과 딸이 번갈아 타는 걸 지켜보다 재미있을 것 같아 나도 처음 타봤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니 고단했던 한 주의 긴장이 스르르...

아 주말이구나.


이훈기 作 <Pillar>




문화제조창C 3층에서 비엔날레의 기획전시가 시작된다. 긴 생머리가 찰방찰방한 청소년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니 머리 위에 독일 조각가 Angela Glajcar의 작품인 종이 터널이 드리워진다. 조명에 따라 바닐라 라테 빛깔, 바나나 우유 혹은 바싹 말린 밀감 껍질 빛깔이 은은히 퍼진다. ‘와우~~’ 탄성을 지르며 터널을 통과하면 형광색 실뭉치를 칭칭 감은 기다란 소금기둥이 세워져 있다. 최정윤 작가 <The Flesh of Passage>라는 작품으로 환상적인 기운이 올라온다. 그 왼편에는 형형색색 사람과 동물 모양의 조각들이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휘영청 키 큰 유리 미남 <Big Man>이 번쩍이고 있으니 영화 속 세상인양 정신이 혼미해진다.


브로슈어를 살펴보지 않고 전시장으로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이 공간이 ‘Section 1 몽상가들(Dreamers)’이다. 꿈꾸는 자들이 만든 공간에서 나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노닐고 있던 거다. 게다가 비엔날레의 주제는 ‘미래와 꿈의 공예-몽유도원이 펼쳐지다’라니.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의 꿈을 꾸고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처럼 꿈속의 낙원을 누비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박성원 作 <Big Man>


최정윤 作 <The Flesh of Passage>



수교 60주년을 맞아 청주공예비엔날레 초대국가로 참가한 덴마크관은 동양의 몽유도원과는 사뭇 다른 세련된 공간이다. 치킨너겟을 먹을 때 콕 찍어먹는 겨자를 연상시키지만 한층 고급스러운 노란색 울,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검정 벨벳, 파이프와 스펀지 등 재료 자체의 특성을 드러내는 게 덴마크 공예의 매력이다. 소파와 침대로 꾸며진 공간에서 자유롭게 앉아 쉬면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어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뜻하는 ‘휘게’ 감성을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덴마크관>


<덴마크관>


각박하고 비인간적인 삶, 삭막하기만 한 오늘의 현실에 꿈처럼 환상적인 즐거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공예작품을 통해 새로운 공예의 미래를 열고자 한다


이것이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주제 선정 이유다. 예술감독이 의도한 대로 우리는 공예의 몽유도원을 느긋하고 즐겁게 거닐었다. 나이지리아 작가인 응고지 에제마의 <Think Tea, Think Cup II>와 심재천 작가의 <빗살무늬 채색병>을 지나 헝가리 전시관의 물고기를 삼키는 푸른 유리 물고기 등 아름답고 환상적인 작품들 사이사이를 유쾌하게 산책했다.  


응고지 에제마作  <Think Tea, Think Cup II>


 심재천 作 <빗살무늬 채색병>


유리, 섬유, 도자 등 각양각색의 재료를 1,200명의 작가들이 주무르고 굽고 깨고 붙여서 만든 작품들을 둘러보니 바싹 말라붙었던 내 감수성 창고에 포도주를 콸콸 들이붓는 것 같았다. 촉촉하고 향기로운 냄새에 취해 비틀거리며 몽유도원을 나왔다.


“딸, 오늘 본 작품 중 뭐가 제일 맘에 들어?”


“덴마크전에서 본 크고 동그란 거, 반짝이는 거.”


“ Sun Disc처럼 생긴... 제목이 뭐였더라?  

엄마는 맘에 드는 작품이 너무 많은데, 하나를 꼽자면 음... 탄소 섬유를 꼬아서 빛을 뿜어내는 노일훈 작가 작품이 좋았어."



노일훈 作




처음 와 본 청주, 그리고 청주공예비엔날레.

현대미술 감상은 뇌 마사지에 으뜸이다.

어제만 해도 골치 아픈 일과 인간관계로 마음이 퍼석했는데 이렇게 탈탈 털어지다니...


50년 넘게 청주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극동반점>의 만 칠천 원짜리 푸짐한 탕수육은 덤이다.


낯선 장소와 낯선 것들이 뇌를 살살 간질여 주니

다음 주는 넉넉히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이상헌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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