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고난 in 로마>
한 순간에 길 잃은 미운 오리 새끼들 마냥 기차역 한 복판에 버려진 느낌이다. 피맛 나는 노동과 이에 동반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한 동안 서로를 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내가 으흐흐흐 하면 동생이 으흐흐흐 하고 동생이 으흐흐하면 내가 으흐흐흐하고.. 서둘러 정신 차리고 재빨리 표차장을 찾아야 했다.
우리에겐 두 가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한 시간 후에 베네치아로 떠나는 기차표를 끊고 베니스에 도착하여 두 시간 만에 밀라노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다섯 시간 후에 밀라노로 떠나는 기차를 탈 것인지.
마음 같아선 스페인 일정을 늦춰서라도 베네치아에 머물고 섹시한 베니스 뱃사공의 달달 한 세레나데를 듣고 싶었지만 “초”저가 항공 티켓을 끊은 탓에 시간 변경도 안될뿐더러 두 시간 만에 베니스를 구경하는 것도 무리다 싶어 로마에 5시간 동안 더 머물기로 정했다.
우리는 의지의 한국인. 다시 콜로세움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지하철을 사용하면 아주 손쉽게 찾아 갈 수 있다고 하여 불과 10분 전에 기차 값 2만 원을 훌렁 까먹어서 씁쓸해진 마음을 뒤로 한 채 달달 떨리는 손으로 동전을 꼼꼼히 세가며 전자 개표기에 3.5유로를 집어넣었다. 전자 개표기 앞에 서서 표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관광객이 나를 보고 말했다.
“쭝궈런 마?” (중국인이세요?)
아니에요 이 사람아.. 나 대한민국 사람이야..
“뿌 쓰” (아니요..)
머리를 긁적이며 가는 쭝궈의 소뇌를 강하게 5초째려봤다.
아무튼 기차 티켓으로 예상 지출에 타박상을 입은 터에 로마에서의 더 큰 지출을 막기 위해 아침에 마트에서 구입한 해바라기 씨앗 묶음과 초콜릿 한 판, 그리고 포도 송이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점심시간 이라서 그런지 아까 전보다 지하철에 사람이 많았다. 꾸역 꾸역 타고나니 여기저기 난리가 났다. “맘마~ 뮈~아~” (오 마이 갓). 가만히 보면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는 난처한 일이 생겼을 때 엄마를 찾는 것 같다.
지하철을 타고 세 정거장 지났더니 뿅 하고 순식간에 도착했다.
콜로세움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엄청 많이 훨씬 컸다. 끝이 부러져서 생기다 만 경기장인 줄 알았는데 달팽이 모양처럼 설계하고 구멍을 많이 뚫어놔서 짧은 시간에 모든 사람들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벽면에 자잘한 구멍이 많이 뚫려있는데 콜로세움 안에 보관되어 있던 청동이나 돈 되는 것들을 빼가려고 낸 구멍들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를 가도 시민 의식에서 악취가 나는 사람들은 꼭 있는 것 같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 2동에서 12월 26일 오후에 태어난 오세영처럼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까이 서는 몰랐는데 멀리서 보니까 4층 발코니까지 사람들이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콜로세움에 비해 너무 작다 보니 코에 난 블랙헤드처럼 보였다.
30분 간 콜로세움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본 후, 누가 내 콩팥 하나 훔쳐간 듯한 허무함을 버릴 수 없었다. 콜로세움 30분 보자고 2시간을 걷고 2만 원어치 기차도 놓치고 해바라기 씨로 점심을 대신하며 온 것인가.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근처 공원 계단에 쭈그려 앉아 해바라기 씨 받아 먹기를 한 시간 정도 했다. 우리 옆에는 타원형 모양으로 큰 잔디밭이 있었는데 방금 하교한 학생 둘이서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이면 좋은데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생활과 굉장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학생들뿐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에게도 참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예전 것을 최소한으로 망가뜨리고 유적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들. 가끔은 고전적인 것에서 불편함이 있을 수 있는데 그 또한 자신들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고전과 현대를 자연스럽게 융합시켜 생활하는 그들이 참 존경스러웠다. 국보 1호 숭례문에 불이나 내고 홀랑 태워먹는 일이나 절대 없었으면 좋겠다.
그림자가 길어질 때 즘, 걸어서 20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아까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5시 30분경 기차역에 도착했다. 다시는 기차를 놓치지 않으리 생각하며 2시간 일찍 왔더니 인터넷도 안되고 피곤해서 거의 뻗을 지경이다.
배도 곯아서 기차역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저녁을 때우려고 했는데 왠 걸 맥도널드가 엄청 비싸다. 야채도 없이 치킨 패티만 들어간 치킨버거와 햄버거 패티만 딱 들어간 햄버거가 가장 싸길래 그거 두 개를 시켰더니 1.6유로가 나왔다. 그래서 저녁은 2천 원 때로 끝낼 수 있었다.
아침부터 더티 섹시가 좔좔 흐르는 남정네들에게 지지 않겠다고 괜히 화장을 해서 얼굴도 텁텁하고, 하루 종일 해바라기 씨앗을 씹었더니 입도 텁텁하고, 오랫동안 걸었더니 발도 텁텁하고. 물을 계속 마시다 보니 방광도 텁텁하고.
안녕하세요 텁텁이라고 불러주세요.
게다가 이탈리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공화장실에서는 1유로를 첨부해야 들어갈 수 있다. 방금 전에 말했지만 우리 둘이 저녁을 1.6유로에 먹었는데 지금 화장실에 1유로가 웬 말인가. 기차 안에만 들어가면 공짜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
결국 텁텁이는 2 시간 동안 그녀의 명성을 이어가야 했고, 했다.
기차를 타고 밀라노에 도착했고 시간의 거의 자정이 다 되어갔다. 밀라노 공항까지 또 다른 기차를 타고 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그때 어느 숙자 아저씨가 우리를 불러 세우는 게 아닌가.
“쎄뇨뤼타~ 어디 가세요?”
턱수염 덥수룩하게 나고 회색 비니를 쓴 아저씨가 말했다.
“밀라노 공항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는지 아시나요?”
“오! 마침 거기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밖에 있어요. 아마 12시 30분쯤에 떠날 거예요.”
“정말요? 기차를 타고는 못 가는 거예요?”
“기차를 타면 어차피 내려서 또 버스를 타야 해요. 내가 안내해 줄 테니 따라 오세요.”
순간 저번 연도에 본 영화 “테이큰”이 기억 속을 헤집고 나왔다.
“아.. 되었어요. 저희가 그 전에 어딜 들려야 해서.. 어떻게 가야 하는 지만 알려주세요.”
“그럼 이리이리 저리 요리 가세요”
“아~ 감사합니다 아저씨.”서둘러 움직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정보가 도움이 많이 되었으면 커피 한잔만 사줄 수 있어요? 아니면 1유로 라도 괜찮은데..”
아저씨, 저희 1유로 없어서 콜라 없는 햄버거 먹고 화장실도 3시간이나 참은 사람들이라고요.
그 아저씨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니 정말로 막차를 탈 수 있었고 1시 30분경 무사히 밀라노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6시 45분 출발이어서 공항에서 밤을 새야 했는데 이 공항은 저가비행기만 취급하는 곳이라 그런지 공항 입구와 그 안에 빵집 하나만 빼고는 모조리 문을 닫는다. 그래서 5시까지 난방도 잘 되지 않는 그 빵집 의자에 앉아 밤을 새야 했다.
저가 항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침낭이나 텐트, 심지어 그냥 이부자리까지 가져와서 공항 안에 펴놓고 자는 것 같던데, 정말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나도 언젠가 짬밥이 쌓이면 저렇게 하고 말리라.
5시, 드디어 수하물 체크인을 시작했다. 맨 앞에서 세 번째에 서있다가 우리 차례가 되어 메일로 받은 티켓을 그들에게 보여주는데 코 큰 여자가 우리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비행기를 탈 수 없어요. 우리 비행기는 티켓팅 24시간 전에 미리 인터넷으로 온라인 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이미 늦은 것 같네요.”
이 사람아, 이 무슨 청천병력 같은 소리야?!
“아니, 우리가 여기서 새벽 2시부터 기다렸는데 무슨 소리예요.”
우리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막 째려보고 있으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종이 쪽지 한 장을 내밀더니 케시어에 가보라고 했다.
“아마 너무 늦지 않았으면 케시어에 벌금을 물고 티켓팅을 할 수 있을 수도 있어요. 근데 이것도 그냥 가능성일 뿐이에요. 이미 45분 정도 밖에 안 남아서 안 될 수도 있어요.”
“벌금이 얼만데요?”
“한 사람당 70유로예요.”
항공권 두 장을 19만 원에 끊었는데 벌금으로 19만 원이 더 나가게 생겼다.
아하하하…..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