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in 마드리드>
때는 바야흐로 밤이 길어지고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유럽의 초겨울이었다. 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도 아닌 것이 추적추적 내리는 게 마치 우리의 불행을 예고라도 하는 듯했다. 비행기 벌금 사건은 닥쳐오는 대재앙에 비해 그저 시작을 알리는 어두운 그림자에 불과했다.
"동생을 만나게 해주세요......"
내가 기억하는 마드리드 공항은 매우 길었다. 빠른 걸음으로 끝에서 끝까지 얼추 2-30분 걸리는 걸 보아 3km 남짓하는 것 같다.
우리가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였다. 종일 씻지 못했는데 마침 공항에 화장실도 잘 되어있고 플러그도 곳곳에 비치돼 있어서 11시 까지는 태블릿도 충전하고 간단하게 샤워를 하기로 했다.
이태리 공항 안에서 부엉이 눈으로 하루를 센 수영이는 미세한 정맥까지 살아있는 장미 꽃잎처럼 붉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공항에서부터 투덜거리더니 드디어 부글거리던 활화산이 터진 것이다. 수영이는 내가 자꾸 자기만 시켜먹는다고 화가 나 있었다. 영어는 물론이고 불어도 할 줄 알고 이태리어도 얼추 알아듣는 동생을 본의 아니게 마구 우려먹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어디서나 자신만만 7개 국어 여행 회화' 책을 가져갔지만 "하우아 유" 하면 "아임 파인 땡큐 엔드 유?"처럼 대본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용지물 이었다.
"언니, 공항 사람들은 영어 하니까 언니가 이번에는 물어봐"
"알았어. 나한테 맡겨!"
우선 동생을 탑승 구 C50번에서 기다리게 한 후 여권이 든 파란색 앞 가방만 딸랑 들고 안내데스크를 찾아 떠났다. 15분을 걷자 안내데스크를 뜻하는 ⓘ 표시를 찾았다. 그 곳에는 타조 상을 한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드리드 도시 지도를 구하고 싶은데요."
"여긴 공항 안내데스크예요. 쭉 가다가 내려가면 관광 안내 데스크 따로 있어요."
"어.. 관광 안내 데스크까지 어떻게 가야 한다고요?"
"잘 들으라고."
자기 오른쪽 귀 위를 집게 손가락으로 살짝 팔락이면서 다그치는 말투로 말했다.
"당신이 오던 방향으로 다시 걸어가다 보면 Crystal화장품 점 앞에 엘리베이터가 있을 거예요. 그걸 타고 밑으로 내려가면 관광 안내데스크를 볼 수 있을 거야.”
다소 정중하지 못한 대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알았어요. 그렇다고 그렇게 무례할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서 Crystal 화장품 점을 찾아갔다.
10 분 정도 직진해서 무스탕 입은 아줌마 둘이 돌아다니는 한가한 화장품 점은 찾았지만 앞에 배치된 엘리베이터는 도저히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머슴쩍게 서성거리고 있으니 청소부 아줌마가 어떤 카드를 찍더니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것이다.
오호~
다 알았던 것처럼 조용히 그 아줌마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혼자 007 시리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벌렁거렸다.
마침내 1층에 도착했다.
아줌마가 나가는 문으로 조용히 뒤따라 나갔다.
몬스터의 집에 도착했다. 5명의 몬스터가 한 집에 사는데 도로 위에토 하는 게 직업이다. 불쌍해라. 그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자기 앞에 정해진 음식만 가져간다. 얼마나 많은 음식을 포식했는지 토하는 음식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이 집에는 제복 입은 여자 둘이 같이 사는데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가는 걸 체크하는 사람들이다. 몬스터들은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복 입은 여자 한 명에게 길을 물어야 했다.
"저, 관광 안내 데스크를 찾고 있어요. 어떻게 가야 하나요?"
"그거야 아주 간단하죠. 이 집에서 나가면 돼요. 그럼 바로 정면에서 볼 수 있을 거예요."
금발에 빼빼 마른 흰 빼빼로 같은 여자가 말했다.
"나갔다가 탑승구로 다시 돌아갈 수는 있나요?"
"그건 나가서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해요. 이 곳 사람들은 원래 자기 집이 아니면 관심이 없죠."
빼빼로녀는 서툴지만 상냥한 영어로 말했다.
잠시 고민했다. 만약에 나갔는데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동생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 하나 못 알아왔냐고 그럴 것이 뻔하다. 까짓 거 다시 돌아오면 되지 모!
당당히 몬스터의 집을 빠져 나왔다. 제복 입은 다른 여자는 한기가 흐르는 얼굴 위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가 나가는걸 쳐다봤다.
빼빼로녀의 말대로 바로 정면에 관광 안내데스크가 있었다.
"여기가 관광 안내데스크 맞나요?" 마드리드 지도가 벽에 붙이는 달력처럼 척척이 쌓여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지도 위에는 이미 중요한 관광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네 맞아요. 마드리드 지도가 필요하시면 앞에서 뜯어 가시면 돼요." 머리도 붉고 주근깨도 많은 것이 만화 속 빨강 머리 앤이 다 자랐다면 바로 이 여자일 것이다.
"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마드리드 광장에서 론다로 가는 기차역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나요?"
"여기서 가실 거면 노란색 버스를 타고 가시면 돼요. 이 공항 밖으로 나가면 바로 버스정류장이 있으니 거기서 타세요. 돈은 기사에게 직접 내시면 돼요. 광장도 그 버스로 가시면 되고요. 광장에서 기차역까지는 걸어가셔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기차를 어떻게 타는 것까지 알아냈으니 대성공이다.
아까 빼빼로녀가 알려준 대로 위로 올라가니 사람들이 비밀 조직에 들어간다는 듯이 자신의 겉옷과 가방을 검사받고 있었다.
"여권과 비행기 표를 꺼내 주세요." 우리 집 문짝 만한 몸을 가진 사람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마드리드에 도착했는데 다시 비행기를 타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제 가방이 아직 안에 있어요"
"그럼 못 들어가요. 가방을 못 찾았으면 밑에 짐 찾는 곳에 다시 가보시던지요. 비행기표가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저, 방금 전까지 탑승 구에 있었는데 도시 지도를 구하려고 나온다는 것이 아예 밖으로 나와버린 거 있죠. 제 짐은 아직도 탑승 구에 있어요. 동생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오는지도 모르고 나왔다니 말이 안되잖소. 우선 비행기표가 없으면 안으로 못 들어가요. 타고 온 Ryan항공에 가서 도움을 청해보시거나 안내데스크에 가셔서 말씀하세요."
하필 태블릿도 충전한답시고 안에 두고 온 바람에 동생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밖에 위치한 안내데스크를 찾아갔다.
링컨 동상을 닮은 사람이 정장을 입고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제가 마드리드 지도 구한다는 게 이상한 엘리베이터 타고 밖으로 나와버렸어요. 제짐이랑 동생은 아직 안에서 절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나요?"
"그럼 짐 찾는 곳에 가서 짐을 찾으면 되겠네요" 링컨 아저씨는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그게, 그 곳이 아니고 탑승 구 쪽에 있어서요.."
"오.. 그 곳은 보안 지역이라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요. 경찰서에 도움을 청해 보시던지 아니면 타고 오신 Ryan Air에 가서 도움을 구해 보세요."
동생이랑 떨어진 지 1시간이 지났다. 급해진 마음만큼 걸음도 빨라졌다. 재빨리 Ryan air을 찾아가 짐 붙이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흑인 여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옆에서 같이 일하는 노란 머리스페인녀와 한참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지금 여기서 티켓을 구매해서 안으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안내 데스크에서는 Ryan Air에 도움을 구해보라고 하던데요.. 매니저랑 얘기할 수 있을까요?"
"우리 바쁜 거 안 보여요? 매니저님 지금 안 계세요." 검지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얘기하는 것이 정말 얄미웠다.
내가 잘못한 건 알지만 나를 상대해 주지 않는 이 사람들이 너무 얄미웠다. 당장에 앞에서 싸이의 챔피언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소리 지르는 '니거'nigger! '니거'! '니거'!)
동생과 헤어진 지 1시간 30분이 지났다. 다시 짐 찾는 곳에 찾아가다가 운 좋게 옆에 동전을 넣고 사용하는 컴퓨터를 발견했다. 다행히 지갑은 파란 가방 안에 들어있어서 내 ATM 카드로 돈을 뽑을 수 있었다.
사양도 window 2000이면서 10분에 1유로를 받아먹는 뒈지게 비싼 컴퓨터였다. 보아하니 공항 안에서는 15분 공짜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 같았다.
제발 동생과 연락이 닷기를 바라며 뽑은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 바로 페이스 북에 들어가봤다. 예상대로 동생이 메시지를 남겨놨다. 그것도 약 3분 전에..
하지만 한국 말이 읽히지 않아 네모로 보이는데 중간에 D60가 보이는 게 아마 기다리는 곳이 D60인가 보다. 우선 나도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겨놨다.
"밖으로 아예 나와 버려서 들어갈 수가 없어. 혹시 이 메시지를 보게 되면 Arrival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걱정 말고 천천히 나오렴, 근처에서 맛있는 거 좀사먹고 있을게." 10분 동안 내내 메시지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동생은 확인할 생각을 안 했다. 아마 공짜 인터넷을 다 썼나 보다.
그 길로 바로 경찰서를 찾아갔다. 여태까지 있었던 일과 찾아간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 목소리는 거의 반 울고 있었다. 여성 경찰 분은 푹신하고 따뜻한 인상을 가지고 계셨는데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리어 이 분이 울려고 했다. 바로 다른 경찰에게 연락을 해주셨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결국 도착장 앞에 위치한 컴퓨터에 1유로를 더 넣었다. 아직 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난 원래 메시지에 몇 줄을 더 추가했다.
"천천히 와도 돼. ㅎㅎ 나는 잘 있어. 여기는 2번 도착장 앞이야."
꼼짝도 못하고 도착장 앞에 앉아서 1시간쯤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여성분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거쳤다.
"쭝궈런 마? (중국인 이세요?)"
"뿌 쓰.."
중국인들은 어딜 가던 자기 족속을 찾아야 하나. 그리고 그게 나야 하나.
기다리다 지쳐서 옆에 큰 달마시안을 데리고 와서 앉아있는 남성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 남자도 한 20분 앉아있는 것 같은데 중요한 사람 기다리나 보다.
머지않아 갈색 코트를 입은 금발의 긴 머리를 가진 여자가 나왔고 이 남자는 멋진 미소로 여자를 안아줬다. 달달 하구만.. 또 얼마나 쪽쪽쩝쩝 대는지 오랫동안 눈이 심심하진 않았다. 눈치 없는 달마티안이 둘을 갈라 놓고서야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났다.
30분 정도 더 기다렸을까, 눈에 익은 신발 하나가 내 눈 앞에 딱 멈췄다. 동생이다!
닭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탑승구 안에서는 얼마나 울었는지 벌써 눈이 뻘겋게 부어 있었다. 눈물이 고였지만 지금 약해진 동생 앞에서 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별 일도 아닌 걸로 울고 그래! 울 일도 많구먼. 그래도 어떻게 내 메시지 확인했네? :)"
"흑.. 컴퓨터 사용하는 사람한테.. (꺼이꺼이).. 언니 잃어버렸다고.. 흑흑.. 컴퓨터 빌려달라고 해서 확인했는데 언니한테 메시지 와있어서.. (히극히극).."
이렇게 12시 20분경에 동생과 눈물의 상경을 이루었다. 할렐루야.
공항 밖에 위치한 화장실 장애인 칸에서 옷도 갈아입고 앞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화장도 하고, 3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그리고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얘기하면서 몸과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혔다.
부은 눈으로 노란 버스를 기다리면서 어제 출발 전에 산 요플레를 까먹었다. 스위스에서 출발 전에 챙겨놓은 플라스틱 숟가락이 있었기 때문에 바닥까지 잘 긁어 먹을 수 있었다. 눈물 젖은 요플레는 정말 맛있다.
마드리드 광장을 대충 둘러보고 론다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공짜 Wi-Fi를 사용하면서 가족들이랑 잠시 얘기할 수 있었다. 론다에 가기 전에 미리 숙소를 예약하고 드디어 론다로 가는 기차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