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고처럼 격렬하게 - 론다!
스위스는 어디서든 양 손의 엄지 검지를 붙여서 눈 앞에 대면 바로 엽서가 되는 나라이다. 하지만 흰 쌀 한 되에 아주 드물게 붙어있는 쌀벌레만큼 젊은이들이 희귀하다. 심지어 백발의 노인들이 산 정상에 두루 모여 몽블랑을 탄생시키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로..
그에 비해 이탈리아는 대충 서서 고개만 돌리면 문화유산이 '떡' 박혀있는 나라, 그리고 나이와 직업을 불문하고 멋쟁이들이 많은 나라이다. 하지만 높낮이가 심한 이태리어와 그들의 자유로운 손 제스처만큼 규칙과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심지어 신호등 지켜 다니면 되려 치여 죽는다는 소리도 있다.
우리가 도착한 스페인은 그들의 격렬한 플라멩고 같이 역동적인 나라이다. 위에 나라와 같이 굳이 단점을 꼽자면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애. 정. 행. 각.
얼마나 심한지 굳이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문자를 하면서 'ㅋㅋ'를 쓰는 횟수만큼! 대화가 끊길 때마다! 키스를 한다.
예문)
여 - 어머, 반갑다 (쪽쪽)
남 - 잘 지냈니? (챱챱)
여 - 피카소 전시회 가서 포도주나 마시면서 얘기할까?(냠냠촵촵)
덕분에 론다까지 가면서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으로 맑아진 나의 망막 신경에 극도의 손상을 입어야 했고 이탈리아에서 남정네들로 따뜻해진 나의 마음은 다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론다... 론다... 넌 내가 잃은 만큼 많이 보여줘야 할께야......
우여곡절 끝에 절벽 위의 작은 도시, 론다에 도착하였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이라 일부러 가장 일찍 도착하는 기차 편을 예약하여 오후 5시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둥근 달님이 론다 위를 은근히 밝히고 있었다.
여전히 무거운 우리 짐을 짊어지고 미리 예약한 숙소를 찾기 위해 이 사람 붙잡고 저 사람 붙잡고 물어 물어 20분을 걸어가니 아까 탑승했던 저가항공 비행기 기 입구만한 문간에 도착하게 되었다.
"모야, 간판도 없고 불도 꺼져있고. 여기 맞아?"
"여긴 거 같은데?" 수영이가 주소를 재차 확인하더니 곧이어 문 왼 벽에 붙어있는 배꼽 만한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을 누른지 1분도 지나지 않아 168센치 정도의 키에 마른 체격을 가진 20대 초 중반 동양인 남자 한 명이 검정 뿔 테를 쓰고 동굴 밖으로 길게 자란 코털을 씰룩이며 나왔다.
"네, 무슨 일이시죠?" 어눌한 영어지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수한 시골사람 이미지였다.
"좀 전에 인터넷으로 숙박을 예약했는데요.. 여기가 맞나요..?" 다소 소심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 여기 맞아요. 사실 저도 어제 많이 헤맸는데 여기서 숙박했던 한국인을 만나서 알았지 뭐예요. 헤헤.. 따라오세요. 여기 주인이 식당도 운영하는데 보통 그 식당에만 있더라고요." 영어가 완벽하지 않았지만 정말 친절하게 열심히 영어로 설명하면서 얘기했다.
식당까지 거리가 5분가량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나 나이 같은 걸 공유하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제 이름은 스페인 어로 피에트레 에요. 영어로는 피터고요. 타이완에서 왔는데 유럽에 배낭여행 온지는 거의 삼 주가 다 돼 가요."
"저희는 한국사람인데 동생은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저는 필리핀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그럼 론다에 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어요?"
"바르셀로나에 2주 있었어요. 원래 바르셀로나에 그렇게 오래 머무는 사람은 드문데 저는 워낙 축구를 좋아하거든요."
메시의 골수팬인 그는 하루에 팔천 원 남짓으로 식사를 때우면서 그 비싼 FC바르셀로나 경기와 FC바르셀로나 역사 박물관까지 깨 뚫고 온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금세 식당까지 도착했다.
"여기, 숙소 예약하셨다고 손님이 왔는데요.”
피터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식당 6인용 테이블도아기 전용 식탁으로 만드는 덩치 (위로 덩치 아니고 옆으로 덩치)가 웃으며 다가왔다.
"따라오세요"
피터와 덩치님과 우리는 다시 간판도 없는 집 문 앞에 도착했고 피터는 다시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덩치님은 우리를 데리고 바로 왼편에 똑같이 생긴 문으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가는 모양이었는데 하필 지하에 있는지 밑으로 통하는 통로와 방의 불이 모두 꺼져 있고 덩치님의 거대함이 더해져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너무 싼 거 끊은 거 아닐까? 유럽에서 조식 포함 두 사람 사 만원이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피터한테같이 와달라고 할 걸.."
"여기 혼자 예약하고 오는 사람들은 무서워서 못 오겠다.." 전등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 약해서 어둑한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아저씨와 틈틈이 간격을 유지하고 한 손으로는 앞 가방을, 다른 한 손으로는 배낭을 꼭 붙들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가방으로라도 공격하려고..
필리핀에서는 치안용으로 항상 긴 우산을 오른손으로 들고 휙휙 돌리면서 다녔는데 여행 오면서 내 우산을 깜빡한 게 이때서야 후회가 되었다.
내려가자마자 그 넓은 공간에서 오른쪽 구석에 책상 하나와 그 위에 컴퓨터 한 대, 그 옆에 스캐너 딸린 프린터 하나가 전부인 모양이 마치 취조실 같았다.
"여권 주세요" 덩치님은 바리톤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요.. 저희 예약 정보는 제 아이폰에 캡쳐해놨어요." 수영이가 노란 케이스로 감싸진 아이폰을 덩치님 눈 앞에 내밀었다.
긴장의 7분이 지나고 드디어 덩치님의 상냥한 미소가 돌아왔다.
"자, 우선 이 작은 지도 받으세요. 여기 동그라미 친 곳이 내일 아침 밥을 먹는 곳이에요. 그리고 방을 안내해 줄 테니 따라오세요."
덩치님을 따라 아까 피터가 들어간 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문을 여니 두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너비의 계단이 스무 개 정도 있었는데 역시 덩치님은 혼자서도 꽉 끼었다.
계단 끝에는 가정식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문을 여니 아까 만났던 피터가 웃으면서 우리를 반겼다.
호스텔은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곳이었는데 입구에서 바로 왼쪽에 세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방이 하나 있고 입구에서 열 걸음 정도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공동부엌이 있고 그 부엌 안에 다른 문을 열면 바로 세탁실이 있다. 부엌을 나와 통로의 끝에는 큰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을 마주 보고 왼편으로 돌면 킹 사이즈 침대가 있는 방이 있고 그 방을 마주 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다섯 걸음 정도 가면 공동 거실에 도착하는데 텔레비전도 있고 책장에 꽤 오래된 서적들도 꽂혀 있고 소파와 테이블도 아주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피터의 방은 공동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일인용 방이었다.
우리가 사용할 방은 킹 사이즈 침대가 있는 곳으로 아늑한 불이 나오는 스탠드가 양 쪽에 있고 위에 LG히터도 달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손님 맞이용 사과와 귤이 담긴 과일바구니와 각종 티백과 커피포트는 덩치님을 사랑스러운 곰 인형으로 보이게까지 했다.
이 호스텔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바로 공동 거실에 붙어 있는 베란다에서 정면으로 똬~! 보이는 누에보 다리...... 어머 사랑스러워..
저녁이라서 누에보 다리는 양 옆 아래 위 정면 뒷면에서 노란 빛을 받고 있었는데 보고 있노라면 경이로울 따름이다. 누에보 다리는 군 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다리인데 120m의 절벽이 둘을 나누고 있고 그 밑에 강도 흐르고 있어서 소통에 큰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120m는 아파트 40층 높이와 맞먹는다. 이 다리를 짓느라 몇 명이나 죽었을까..
실제로 참 사연이 많은 다리인데 40년을 걸쳐 완공된 이 다리는 설계한 건축가가 마지막으로 다리에 자기 이름을 새기려다 추락사하고, 스페인 내전 때 민족주의를 떨어뜨려 죽이는 사형 대 이기도 했고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지 이기도 하다.
참말로, 피 많이 본 다리 구만.. 아무튼 지금 그 다리를 눈 앞에서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감회가 새로우니 사진 몇 장(?) 박아주고! 체크인 당시 받은 긴장도 풀리고 오랜만에 따뜻함도 선사받으니 갑자기 배에서 고동소리가 멈추질 않았고 재빨리 옷을 갈아 입고 장을 보러 나가기로 했다.
론다 길거리는 흡사 신림 6동 시장을 방불케 했다. 저녁 8시가 다 돼가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호호 웃으면서 거리를 거니는걸 보니 확실히 오후 6시면 모든 상점이 닫는 스위스와는 다른, 정말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가게들이 양 옆으로 진열된 것이 딱 둘러보기 좋았지만 우리는 스위스를 벗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언제 가게 문이 닫힐지 모른다는 압박에 단걸음에 동네 슈퍼를 찾아갔다.
정말 쇼킹한 사실! 스페인은 사람들만 친절한 것이 아니라 물가마저 친절하다. 2L 물이 고작 800원 이었다. 사랑합니다 스페인.
과일 가게에 가서 덩치님 주먹만 한 토마토 여덟 개, 엄청 큰 청포도 한 송이, 키위 네 개, 귤 두 망이 다 합해서 만원 밖에 안 나왔다. 놀라지 마시라!
계란 여섯 알, 일본 컵라면 소 짜 두 개, 다이어트 콜라 캔 하나, 훈제 베이컨 1인분, 씻어 나온 샐러드용 야채 2인분이 다 합해서 8000원이 안 넘었다. 사랑합니다 스페인.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가게 구경은 내일 하고 밥부터 먹자!
공동 부엌에 들어와 바로 계란 프라이 하고 베이컨 튀기고 마지막 라면까지.. 하.. 오늘 하루 예술일세..
"피터, 혹시 계란 좋아하면 프라이 한 거 같이 먹을래요?" 수영이가 곧 우리 뱃속에 들어올 계란에 신이 났다.
"전 채식주의자라서 괜찮아요." 멋쩍은 웃음을 지는 피터
"채식주의자요? 혹시 종교에 관련돼 있는 거예요?"
"아니요. 그냥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게 싫어서요.."
아이고.. 착한 피터.. 몸이 마른 게 괜히 마른 게 아니었구나.. 하지만 피터가 "살아있는 구시렁" 할 때부터 우리 입 안에는 이미 반숙된 계란이 춤을 추고 있었다.
배불리 먹고 따뜻한 물에 샤워까지 했는데 따뜻하게 데 펴진 방 안, 푹신한 침대 속에 폭 들어가 누워있으니 잠이 절로 왔다. 왠지 내일 컨디션은 최상일 것 같다. 흠... 내 컨디션이 최상이라.. 게다가 수영이 컨디션까지 최상이 될 거란 말이지......으흠......
약간 걱정되는 게 있지만 설마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