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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스페인 (3)

<부활하여 활개치거라 가족 징크스여~>

by 오셍

우리 가족에겐 구름을 부르는 능력이 있다. 제주도에 세 번을 갔지만 여름에는 자동차 유리창이 깨져버릴 것 같은 폭우로 자동차 안에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은커녕 100미터 전방을 보는 자체가 불가능했고 겨울에는 폭설로 인해 반쯤 잠긴 돌하르방을 봐야 했다. 결국 우리 가족의 체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때 즈음 구름도 서서히 걷혔다. 요 징크스는 항상 걸림돌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 아빠가 기억하는 필리핀은 아주 시원하기 짝이 없는 지상 낙원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나와 수영이가 기력을 회복하니 이 능력 또한 서서히, 하지만 아주 강하게, 충전되고 있었다.

"수영아, 일어나 벌써 7시야! 밥 먹고 돌아다니려면 시간 부족해!" 샤워를 마치고 난 후, 아직도 이불 속에서 꼼지락 대고 있는 동생을 깨웠다.
"언니 혼자 가라고. 난 더 잘 거야.. 언니처럼 여행하는 거 피곤해 죽겠어.."
"찡찡 대지 말고 빨랑 일어나! 아침밥 먼저 먹고 천천히 돌아다니자. 자~ 언능 언능!"

기지개를 펴더니 팔에서 뚝 목을 돌리더니 목에서 뚝 뼈 끊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오랜만에 편하게 잤더니 여기가 쑤시네 저기가 쑤시네 말이 많다. 진짜 피곤하긴 했는지 두 눈이 햄버거 빵처럼 부어있다. 나뭇가지 마냥 얇은 몸 일으켜서 욕실로 가는 뒷모습이 좀 안쓰럽기도 하다. 허나우리에겐 무한대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쉴 새 없이 발을 굴리고 눈을 돌려야 했다.


7시 30분, 덩치님께 어제 받은 지도를 들고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쳐주신 식당에 찾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호도 독.. 호 독.. 호도독..'
"이 정도 이슬 비는 다 맞고 다니잖아. 하늘도 맑고 얼마 오지도 않고 그 칠 것 같은데?"

초록색 후드 티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자를 쓰고 동생은 코트에 달린 모자를 쓰기로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디뎠다. 큰 길로 나가 거대한 동상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꺾어서 3분 정도 걸어 우리가 찾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올라~ (안녕하세요)" 묶어 올린 금발의 여 직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 냈다.
"올라~ 제 이름으로 주인 아저씨께서 예약해 놓으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아침밥 먹는 것 맞나요?"
"네, 오 수영으로 예약돼 있습니다. 아무 곳이나 먼저 앉아 주세요."

아침이 고슬고슬한 쌀밥은 아니어도 벼에서 나오는 작물이었으면 하고 내심 기대했지만 스페인 식 아침 (손바닥 만한 흰 빵 두 조각과 토마토를 갈아서 만든 소스와 딸기 잼과 버터, 그리고 방금 추출된 커피와 오렌지 주스)이 나왔다.

10882200_918503831492961_2154778186167566954_n.jpg 토마토 소스와 올리브유를 뿌려 먹는 스페인 식 아침

평면 텔레비전이 걸려져 있는 벽 바로 앞 자리를 차지했는데 텔레비전에는 뮤직 비디오가 틀어져 있었다. 스페인 버전 아이돌 같았는데 뮤직비디오에 돈을 못 들이는 건지 안 들이는 건지, 아파트 주차장 한 층도 아닌 한 칸을 빌려서 찍은 것 같다.


"자, 이제 슬슬 돌아다녀 볼까?"
둥그런 식탁에서 커피를 못 마시는 동생 커피까지 두 잔을 꺾어 마셨더니 오래간만에 카페인 빨이 돌아서 컨디션이 최고점을 찍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의 능력에도 슬슬 입질이 오고 있었다.

'후드득.. 후둑.. 후드득.. (비)' '후우웅~~ 후웅~~ (바람)'
상상컨대 불국사의 다보탑 만한 용이 눈물을 흘린다면 이 정도 굵기의 눈물 방울이 만들어질 것이다.


"어.. 이거 날씨 왜 이러냐.. 걸어 가다가 우산 파는 곳 있으면 하나 사야겠다.." 초록후드 티 모자를 뒤집어 쓰면서 말했다. 우선은 옷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누에보 다리가 보이는 쪽으로 걷기로 했다. 돼지 다리를 소금에 절여 말리고 있는 하몽 가게와 장화 가게를 지나고 론다 기념품 점도 지나고 도자기 같은 유리로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가게 전 면을 꽉 채운 상점도 지나 쭉 길을 걸어 골목의 끝에 다다르니 미술전시장을 둘러쌓고 만들어진 공원이 있었다.

10429291_918504151492929_5989803707330961506_n.jpg 갖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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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고 빨간 옷을 간드러지게 입고 있는 키다리 나무들이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흔들 인사로 신사들처럼 우리를 맞아주었다. 산책길의 양 가 쪽에는 이불처럼 폭신하기도 하지만 끝이 살짝 그을린 스파게티 면을 씹을 때처럼 '바삭'소리가 나는 노란 낙엽들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수영아, 저기 중간에 서봐. 사진 찍어 줄게"
조금씩 세지는 바람에 어깨를 웅크리며 말했다.
"언니가 가서 서, 내가 찍어줄게"
"아 그냥 빨리 가서 서. 추워죽겠어"
내 닦달을 못 견딘 수영이는 키다리 나무들 중간, 노란 낙엽 산맥 중간으로 가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동생이 선 자리에서 나도 사진을 찍고 산책로를 한번 돌아보기로 했다.

비 때문에 축축해진 산책로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중간중간 있는 나무 벤치와 작은 분수 동상이 비와 어우러져 가을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그렇게 신사 같았던 나무가 미친 박자에 맞춰 디스코를 추듯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영아, 빨리 우산 사는 곳 알아봐야겠다.”
하필이면 아침에 오리털 조끼를 입고 나와서 팔에 데미지가 컸다.

10882118_918504211492923_6883645026005457492_n.jpg 비와 함께 씻겨나간 멘탈...

공원을 나와 오른쪽으로 쭉 걷다 보니 나보다 약간 큰 투우사가 천을 휘두르고 있는 동상이 눈에 띄었다. 투우사 몸매가 아주 잘 빠졌다. 호기심을 가지고 상아색 벽을 따라 앞문까지 걸어가 보니 엄청 커다랗고 튼튼해 보이는 갈색 문 앞에 화가 나 있는 소의 동상이 있었다.


이곳은 매 주일마다 실제 투우 경기가 펼쳐지는 스페인에 몇 안 되는 투우장이었다. 하지만 이 날을 주일이 아니었기에 경기를 관람할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뛰어 들 것 같이 근육의 섬유질 하나 하나까지도 아주 섬세하게 조각된 검은 소 동상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마침 앞에 기념품 가게가 있어서 우산을 사려고 했으나 10시 깨나 연다고 하여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왔다. 그리고 이쯤 우산이무용지물이라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우리 옆을 지나가는 우산대 중 팔각형 이하의 것들은 이미 뒤집히기 시작했다. 바람에 뒤집히고 위 아래로 펄럭이는 우산 꼭대기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비를 맞지 않으리라는 신념으로 걸어가는 아줌마 아저씨의 노력이 참 가상하다.


우리는 비를 맞았지만 하나도 젖지 않았다. 이는 마치 건조기 밑에서 건조되고 있는 손가락과 같았다. 단지 손을 씻김과 건조를 동시에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숙소에 돌아가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 투우장 옆이 우리가 찾던 누에보 다리였기 때문이다.

10858362_918503881492956_1874954332585912097_n.jpg 신가시의 끝에서, 구가시를 배경으로

"아기 다리 고기 다린 누에보 다리! 와.. 대박.. 수영아 저거 봐, 우리가 잔 숙소가 저기야, 완전 절벽 끝 쪽이야!"
"와.. 언니 밑에 봐봐.”수영이가 노란 아이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아오 현기증 나.. 수영아 거기 난간에 서봐, 내가 밑에 흐르는 강이랑 같이 찍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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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언니도 같이 찍자.”
수영이의 다년에 걸친 셀카 경력으로 함께 사진을 찍는 건 성공했으나 내 얼굴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10882131_918503924826285_4817251445972490049_n.jpg 누에보 다리 위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단독 샷


1017562_918503908159620_4517293103822198851_n.jpg 실제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지


누에보 다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마구 누리며 사진을 찍고 누에보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려고 했으나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서 포기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공동 거실에 앉아있는 피터와 마주쳤다.

“피터, 오늘 안 나갔어요?”
“비가 너무 많이 오더라고요. 유럽에 와서 여행 다니면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적은 처음이에요. 밖을 보세요, 완전 태풍 수준인데요?”
“하하.. 미안하게 됐네요. 어딜 가도 우리 가족 징크스라.. 어제 너무 잘 잤나 봐요.”

밖을 보니 정말 누에보 다리 밑에 흐르는 강이 용 오름 쳐서 올라올 것 같이 바람이 많이 불었다.

“이런데 어떻게 나갔다가 왔어요?”
“누에보 다리는 보고 왔는데 밑에 까지는 못 갔어요. 비 때문에 미끄러워서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해서요..”
방광 폭발 설은 비밀로 해두었다.
“피터 오늘 나가죠? 피터는 다음 목적지가 어디예요?”
“마드리드에 갈 거예요. 가서 한 이 주 정도 있다가 스위스로 가고 스위스에는 한 이삼 주 머물 것 같아요. 그럼 세영은 어디로 가요?”
“오늘 오후에 떠나서 저녁 때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할 것 같아요.”
“와.. 진짜 빡 세게 다니시네요.. 그 전에 비가 좀 그쳐야 할 텐데..”


30분을 방 안에 히터를 틀어놓고 비와 함께 날아간 체온을 올리려 누워있자니 다음 여행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대로 자고 싶은 본능이 꼬물대고 이에 따른 잡생각이 마구 끼어들기 시작했다.

11시 20분, 청소부 아줌마 두 분께서 집에 들어와 이곳저곳 청소를 하셨다. 다음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는 것이다.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이 있는 법.. 인생이다 그런 거겠지. 떠나 보낸 것을 아쉬워하다가 눈을 돌려보면 어느새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어느 것을 잃고 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은 나무던 사람이던 생물들이 살아가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수단이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에휴.. 좋은 곳이라도 미련 버리고 빨리 가야지. 우리가 갈 곳은 또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10분 후, 숙소체크 아웃을 한 후 다시 서로의 등껍질을 매고 기차역으로 갔다. 여전히 비는 거세게 내렸지만 기차역까지 걸어서 20분 밖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12시 45분 기차였는데 11시 40분에 도착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갈까 생각했는데 기차역 카페에서는 내 동생이 그렇게 먹고 싶다고 어제저녁 내내 노래를 불렀던파엘리야 (=파에야)를 팔지 않았다. 수영이는 굳이 파에야 파는 곳을 알아보겠다며 날 가방지킴이로 두고 다시금 기차역 밖으로 나갔다. 수영이가 나간 후로 바람이 거세지고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 혹시 얘가 너무 파리해서 바람에 날아갔나 걱정했으나 잠시 후 식당이 3시부터 연다는 비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 점심은 어떡하지? 벌써 배고픈데.. “
“그렇게.. 아까 슈퍼에서 뭐라도 사올걸 그랬나?” - 12시 20분
“그럼 지금이라도 빨리 가서 사올까? 아직 20분 정도 시간 있는데..”
“그래, 그럼 간단하게 크로와상이랑 크림치즈랑 햄 좀 사서 샌드위치 해먹자!”


12시 25분: 가게 도착

12시 30분: 장보기 끝

12시 35분: 드디어 계산할 차례

12시 40분: 계산 완료

12시 42분: 우산이고 뭐고 눈썹 휘날리게 뛰어서 기차역 도착

12시 45분에 기차가 도착하고 우리는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다.


기차 탑승과 동시에 햇살이 비추고 무지개가 떴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무심한 날씨 같으니라고……


그래도 바르셀로나 행 기차 안에서 기찻길을 중심으로 커다랗게 생긴 쌍 무지개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하늘에는 색연필로 2차원 적으로 그린 듯 한 구름 조각이 위 아래로 삼겹살 한 점 만한 크기로 떠있는 것이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만들었다. 그리고 옆에서 목 떨어져 나갈 듯 자고 있는 수영이..


눈 좀 다 감고 자..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