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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스페인 (4)

<긴장 백배 첫날 밤 in 바르셀로나>

by 오셍

저녁 8시경 막상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니 이태리나 스위스 또는 스페인의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영상 15도의 따뜻한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여기 진짜 따뜻하다.. 여행 중에 이 노랑 오리털잠바를 벗게 될 줄이야..”
점퍼 안에 입었던 목티도 답답했던 지라 한껏 목 부분을 잡아 늘렸다.
“내 말이..” 수영이도 슬슬 코트를 벗고 있었다.
“우선 오늘은 일찍 들어가고, 내일부터 돌아다니자. 어디로 가서 잘까?”
“언니! 나 꼭 바르셀로네타 가보고 싶었어! 바르셀로네타!” 수영이가 바르셀로네타에 가자고 노래를 한참 불렀다.
“아 왜.. 거기 가려면 또 기차 타야 되는데.. 거기 뭐가 있다고..”

나의 바르셀로나 계획은 도심에서 창조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을 보는 것이었는데 바르셀로나 끝 쪽에 위치한 바르셀로네타를 가고 싶다니?

“이번에 우리 졸업 과제가 4성 호텔을 운영하는 운영 안을 내는 거였다? 근데 우리 조에 스페인 애가 한 명 있었는데 걔가 추천한 곳이야. 근데 조사하면서 보니까 진짜 좋은 곳이 많더라니까? 허니문 여행으로도 딱이고, 막 바다도 옆에 있고 아무튼 거기 꼭 가야 돼.” 수영이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하다.

“아 몰라, 그럼 네가 숙소 알아봐.”

끝끝내 기차 타고 지하철 두 번 타서 다시 20분 걸어가야 하는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 또르르(눈물)


170의 큰 키에 건강하게 태닝 된 피부, CD 만한 얼굴에 높은 콧대와 왕방울 만한 눈, 쫙 달라붙는 블랙 가죽 재킷으로 가려진 회색 목티에 무릎 바로 밑까지 덮는 검은 부츠와 화려한 팔찌, 심플하게 말아 올린 갈색 똥머리와 앞에 잘 정리된 잔머리, 남자는 물론 여자가 봐도 매력적인 한 스페인 여자가 우리가 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바로 위 칸에 서 있었다.

“보라색 라인으로 갈아타고 싶으면 이쪽 방향이 맞나요?” CD녀가 입에 상냥한 미소를 띠며 우리를 향해 물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반짝였다.
“네, 저희도 보라색 라인 타려고 가는 중이에요.”
하필이면 비교되게 감색 목티를 입고 있어서, 이 사람 앞에 있자니 보디빌더 10년 준비한 사람 느낌이 났다.

아니 전생이 기린이었나 똑같이 경추 7개로 만들어진 목인데 무슨 모가지가 그렇게 긴지..

조용히 알아서 제 길 잘 찾아가고 있는 CD녀 뒤에서 이정표를 재확인해가며 걸어가고 있는데 한 곱슬머리 스페인 남자가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 여자를 불러 세웠다. 회색 크로스백에 편안한 티셔츠차림새가 대학생 같았다.

“저기,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가요?”곱슬 남이 자신의 숨을 고르며 얘기했다.
“어머,, 네. 이곳을 가려고 하는데 지금 가는 길이 맞나요?” 다소 놀란듯한 CD녀가스마트 폰 안의 지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곱슬 남이 천천히 걸어가는 CD녀 옆에 짝 달라붙어서 아주 아주 아주 친절하게 이것저것 말을 거는 것이, 딱 보니 이 여자가 맘에 들었나 보다. 나중에 “Gracias(고마워요)”인사와 함께 포옹과 양쪽 볼에 뽀뽀 두 번 하고 깨끗이 헤어지는 걸 보니 여자는 이미 임자 있는 몸이었나 보다.

바르셀로나는 예쁜 여자에게 이렇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수컷들이 찾아와 “어머 혹시 제 콩팥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라며 간이고 쓸개고 다 떼어다 주는 곳인가 보다.

이런 곳을 동생과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저기요”를 난발하면 물어 물어 우리가 묵을 숙소를 찾았다. 또르르..


숙소는 꽤 좋았다. 젊은 청년들을 겨냥한 듯 ‘여행’을 테마로 잘 꾸며진 로비에 파티 구간도 있고 넓은 공동 부엌이 구비된 아주 괜찮은 호스텔이었다. 9시가 넘은 시간에 젊은이들의 파티가 아주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2층에 있는 컨서지를 찾아가 드디어 내 동생 전용 멘트가 나왔다.

비장한 얼굴로..

“제일 싼 방이 얼만가요?”


3층 복도 정면에 위치한 6인실을 얻었다. 들어가보니 이미 두 명의 관광객이 있었는데 40대 중반의 헝가리 아줌마와 18살 된 그녀의 딸이었는데 딸은 어디로 나갔는지 아주머니 혼자 무언가를 심각하게 찾고 계셨다.

“올라~ (안녕하세요)”고개 숙여 인사드렸더니 등 뒤의 거대한 검은 가방이 보였나 흠칫 놀라신 듯했지만 금세 친절한 미소로 화답해 주셨다.
“올라~ 스페인에 놀러 오셨나 봐요?”
“네, 어제 론다에 있었는데, 진짜 좋은 곳이었어요. 누에보 다리도 멋있고 사람들도 친절하고요”
“오, 저도 그쪽 가봤어요. 조금 춥지 않았어요?” 곧이어 가방을 뒤집어서 탈탈 털기 시작하셨다.
“어제는 태풍이 불어서 정말 추웠어요.. 와 근데 바르셀로나는 진짜 따뜻한 것 같아요!” 헝가리 아줌마의 행동이 조금 당황스러워서 일부러 눈을 좀 크게 뜨고 눈알을 굴려주었다.

“여기가 영상 15도라니까요? 하하, 정말 따뜻하죠. 지금 헝가리는 되게 추운데, 세상에 이 사람들은 이 날씨에도 히터를 틀잖아요. 지금 더워 죽겠어요. 혹시 추워요?” 아줌마가 목이 늘어난 얇은 검정 티셔츠를 나풀거리며 말했다.
“아니요, 저희도 좀 더운 감이 있네요. 그런데 뭘 그렇게 찾고 계신 거예요?”
“제가 바르셀로나 여행을 3일을 잡고 왔는데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당장 돌아가게 됐어요. 그런데 지금 여권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아요. 제가 여권 두 개를 소지하고 있거든요. 헝가리 꺼랑 루마니아 꺼가 있는데 지금 루마니아 여권을 못 찾겠어요.” 계속 헝클어진 짐들을 뒤적이시며 말씀하셨다. 외국에서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간간이 보인다.

“어머 근데 둘이 친구?” 헝가리 아줌마가 드디어 가방 뒤적이기를 포기하셨다.
“아니요, 자매예요. 이번에 동생이 대학 졸업하기 전에 같이 유럽 여행하려고 왔어요.”
“아이고, 기특도 해라. 자네들 보니까 우리 딸이 생각나네.. 지금 우리 딸은 엄마 여권 찾아본다고 나가서 말이지. 여자 둘이서 여행하기 힘들지 않아요?” 한참을 침대에 조용히 앉아 계시더니 갑자기 뭔가가 생각나셨는지 다시 급하게 가방을 뒤적이셨다. 곧이어 두 개의 파란색 여행용 튜브를 들고우리한테 오셨다.
“이거 참, 내 딸 같아서 그래~ 여기샴푸랑 바디 워시가 좀 있는데 난 어차피 내일 돌아갈 몸이고 하니 자기들이 쓸래?”
“정말 친절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남은 여행 동안 너무나 필요할 거예요. 고맙습니다~!”

“난 이제 나가 봐야겠네. 이 동내에 친구가 사는데 글쎄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하자는 거지 뭐야. 정말, 나가기 귀찮은데 어쩔 수 없지,, “ 이러시더니 갑자기 묵었던 머리를 풀어헤치시고 딱 붙는 바지에 벨트가 보이게 윗도리를 넣으시더니 휭 나가버리셨다. 완전 나가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룰루~랄라~ 동생이랑 짐 정리를 끝내고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침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약간의 레슬링으로 자리 선정을 마치고 샤워를 하기로 했다. 무슨 화장실에 잠금 고리가 없니? 그런데 아까 전부터 불안불안한 것이 우리가 방을 예약할 때 여성 방인지 혼성 방인지 물어보질 않은 것 같다.

동생이 샤워를 마치고 드디어 내가 샤워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내가 몸에 물을 묻히자마자 수영이가 화장실로 슉 들어왔다.

“아오 깜짝이야! 왜 말도 없이 들어와!”
“언니, 여기 남자도 같이 쓰는 방이었어. 방금 어떤 아저씨 들어와서 침대에 누웠어.. 짐도 없나 봐 그냥 몸만 들어오던데..”
“헐.. 알았어, 우선 나가서 화장실 문이나 지키고 있어봐.” 다급하게 몸에 물을 뿌리면서 말했다.

남자도 같이 쓰는 곳에 화장실 문고리도 없다니. 급한 마음에 후딱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으면서 슬쩍 “잘생겼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ㅎ ㅏ.. 나와보니 왠 걸.. 어떤 키 크고 삐쩍 마르신 40대 초반 아저씨가 술에 취해 신발도 안 벗고 침대에 쓰러져있었다. 주여……
그것도 이 남자는 내 동생 바로 밑 침대를 지정받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이 사람이 지금 자다가 우리 물건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혹시나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래, 우선은 내가 이 여행에서 잊어버리면 안 되는 파란 가방이라도 잘 지키고 있자.’

내 앞 가방에는 동생과 나의 여권을 포함해서 유레일패스, 유로가 들어있는 지갑, 카메라, 태블릿 등 중요한 것만 들어있었기 때문에 내 등껍질 같은 가방을 잊어버리더라도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것 이었다.

이 아저씨가 약간의 미동만 해도 나의 모든 신경들이 같이 일어나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긴장했다.

‘이 사람이 파란 가방을 가져가면 어떡하지. 안 되겠어 불안해..’

그리하여 유레일패스와 여권과 ATM 카드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내 베개밑으로 빼놓고 파란 가방 끈은 오른 손에 둘둘 말고 잠을 청했다. 혹시 내 침대로 누가 기어 오는 소리가들리면 바로 후려갈기려고……


이 날, 침대에서 그 아저씨를 볼 수 있게 옆으로 누워서 혹시 이 아저씨가 움직이나 안 움직이나 째려보고 있어야 했다. 밤새 조금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조용히 가방끈을 부여잡고 눈 윗덩이에 힘을 주어 고양이 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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