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 따윈 약자를 위한 것! In 툴루스>
나이가 들고 그 날을 다시 회상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초겨울 밤이었어요. 정말 하늘에 구멍이 나고 하늘 표 개와 고양이가 싸웠다면 바로 이 날 이었을 거예요. 무심하게 짝이 없는 프랑스 시골 표차장의 창백한 마녀는 우리에게 어떤 기차표도 허락하지 않았죠. 천둥도 큰 소리로 비웃었지만 내 동생 머리 안의 시냅스는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바르셀로나 기차 역..
다른 기차역과 달리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서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승차권을 사는 곳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 옆에 원형 탈모가 있으신 아저씨는 자기 케리어 위에 발을 올리고 앉으셨는데 1분마다 한 번씩 시큼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이, 저녁을 고구마나 계란을 드신 것이 틀림없다.
오늘은 더 이상 소모할 체력이 없어 수영이한테 티켓팅을 부탁해야 했다.
“수영아, 가서 기차 티켓 좀 끊어와..”
론다에서 청년의 패기를 과시하면 비를 맞고 다녔더니 어김없이 감기가 걸려서 체력의 70%를 눈물 내고 코 푸는데 쓰고 있었다. 이제 몸 사려가며 다녀야 할 나이인가 보다. 다행히 어제 바르셀로나 도착해서 이미 어떻게 파리에 찾아가는지 알아놨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됐다.
“저희 내일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밤기차를 지금 예약할 수 있나요?”
앞에 흰색 양복과 백구두로 깔 맞춤을 한 흑 오빠의 순서가 지난 후 드디어 수영이 차례가 왔다.
“바로 가는 건 여기서 예약해드릴 순 없는데.. 우선 스페인이랑 가까운 프랑스의 툴루스 역까지 가셔서 밤기차를 예약하시면 될 것 같네요. 파리 중심가에 어림잡아 아침 6시쯤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산타클로스처럼 흰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스페인 사람이 대답했다.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밤기차는 보통 국경에 가까운 도시에 도착해서 예약을 하거나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하는데 우리는 인터넷 예약을 쓸 줄 몰라 항상 예약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간단하네요. 그럼 툴루스 역으로 가는 티켓 두 장 주세요.”
“아, 참고로 툴루스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는 저녁 10시에 있습니다.”
저녁 7시에 출발하여 9시 30분에 툴루스에 도착하는 티켓을 얻었다.
‘엣취!’ ‘크~~ 응~’
이걸 반복하다 보니 여행 전에 챙겨왔던 휴대용 휴지 한 통을 벌써 다 써버렸다. 코 밑이 헐어서 뻘게졌다. 두 시간 가량 정신없이 코만 풀고 있는데 기장 안내 방송이 흘렀다.
“툴루스로 향하는 기차가 지체되어 툴루스에서 파리로 향하시는 분들은 지금 돌아다니는 기장에게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이 칸에파리로 가시는 분 계십니까?” 큰 키에 턱 주위로 수염을 기른 스페인 기장이 드디어 우리가 탄 기차 칸에 도착했다.
“저희요!” 혹시라도 기장이 우리를 놓칠 까 봐 열심히 눈짓 손짓을 했다.
“지금 툴루스 역까지 가게 되면 기차를 놓치게 될 거예요. 다 다음 역에도 그 기차를 만나게 되니까 그때 내리도록 하세요.”
“저희 아직 기차표 예약을 안 했는데 어떡하죠? 거기서 예약할 수 있는 건가요?”
“아이고, 아가씨들, 거기도 표차장이 있답니다. 거기서 알아보시면 돼요.”
예상치 않게 일찍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와 다르게 바람이 차고 쌀쌀했다. 이때 내린 비바람이 한몫했으리라. 그 곳은 대략 어두웠으며 유동인구도 많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몇 명의 사람들이 같이 내리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다음 열차를 예약하고 와서 조용히 자신들의 플랫폼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요약하자면 허둥지둥 가방 메고 달리는 것은 우리뿐이었다.
“수영아, 어디야! 빨리 달려 빨리! “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로마 사건 이후로 또 이렇게 달리게 될 줄이야.
“언니, 저기, 저쪽으로 뛰어야 돼.” 기차에서 열심히 자던 수영이가 먼저 선두로 뛰어 나갔다.
감기 때문에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사선으로 흩날리며 수영이 뒤를 곧장 쫓아갔다.
그 곳에는 푸석푸석한 금발 머리 위에 대충 얹은 파란 모자와 그걸로도 가려지지 못한 “더” 푸석푸석한 얼굴을 가진 아줌마가 앉아있었다.
“지금 파리로 떠나는 야간 기차 티켓을 사고 싶은데요..” 수영이가 차오르는 숨을 억누르고 말했다.
“뭐라고요?” 영어로 말해서 그런지 조금 성가신 표정이시다.
“20분 후에 도착하는 기차 티켓 살 수 있나요?”
“그걸 지금 사려고요? 그런 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왔어야지. 여기서는 못 사요.”
“그렇지만 스페인에서 출발할 때 여기서 끊으라고 했고 기장 아저씨도 분명히 여기서 살 수 있다고 하셨어요..”
“티켓 부스도 이제 닫을 시간이에요. 미안하지만 내일 아침에 알아보던가 아니면 방법이 없네요.”
“혹시 남은 자리라도 있는지 조회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 열차 도착하면 물어보던가 하세요. 여기서는 할 수 없어요.” 끝까지 땍땍대는 말투로 우리를 대했다.
“아따, 사람 진짜 불친절하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나는 혼자 열을 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조금 있다가 기차 도착하면 그때 물어보자.” 동생은 표차장 앞에 마련된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동생이 앉으려고 하는 자리 옆에는 짧은 머리에 약간 연세가 있으신 아주머니께서 앉아 계셨다. 참고로 내 동생 수영이의 마인드는 “WE ARE THE WORLD, EVERYONE IS MY FRIEND”이다.
“어머,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프랑스어로 간단하게 인사를 건넸다.
난 불어는 하지 못하지만 대략 수영이가 한 말을 이해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저희가 내일 파리를 가는데 여기서 기차를 타면 내일 아침에 파리에 도착하는 게 맞나요?”
“네, 그럴 거예요.. 제가 방금 파리에서 왔거든요. 기차로 7시간 정도 타고 가셔야 해요.” 친절한 답변이었다.
“파리에서 오셨어요? 파리는 어떤가요?”
“뭐…… 굉장히 낭만적인 곳임은 틀림없어요. 아차! 아직 파리 지하철 지도를 가지고 있는데 혹시 필요하면 가져갈래요?”
“정말 좋아요! 분명 가지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동생에게 지도를 건넨 상냥한 아줌마는 자기 기차가 도착하자 옆에 세워뒀던 조금 한 케리어를 끌고 유유히 사라지셨다.
10분 후, 우리가 예약을 했어야만 했던 야간 열차가 도착했다. 기차 승무원들을 찾기 위해 기차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뛰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앞에서 두 번째 칸에서 승무원 여자 승무원 한 명과 남자 승무원 두 명이 내리더니 맞담배를 피려고 준비 중이었다. 수영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찾아갔다.
“봉수아~ (저녁 인사) 라~쿠@((쿠$%&루포쥬^!*%)@*#트뤠니# *$(에스콰풰*%&~? (콧소리 작렬)” 수영이가 말했다.
“비엔 수! 일 위아~ *&$(%)#)&%)@&!_%( 쥬부 쥬부# *(&#(*총총(#*&$(@” 그들은 입술을 한껏 오므리며 코로 소리를 내었다.
“메시 마담~”
불어 일주일만 하면 비염에 걸리고 말 것이다.
아무튼 위의 대화를 줄여 말하자면 수영이가 기차에 남은 좌석이 있는지 물어봤고 그들은 당연히 좌석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좌석을 살 수 있냐고 물어봤고 그들의 대답은 ‘그럼, 그냥 남는 좌석 아무 대나 앉아.’였다. 좌석 칸은 12유로였고 침대 칸은 22유로였기 때문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좌석 칸을 택하였다.
좌석 칸도 나쁘지 않았다. 뒤로 의자를 140도 정도 젖힐 수 있었고 발 받침대도 올라가서 거의 평평하게 누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동생이 커 보였다. 수영이도 경의로 가득 차 반짝이는 나의 눈초리를 느꼈을 것이다.
짐 가방 놓는 곳 바로 뒤 쪽으로 좌석 두 개를 잡은 후 슬슬 잘 준비를 했다. 대충 담요로 가리고 수면 바지로 갈아 입고 점심 내내 돌아다녀 땀에 찬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슬리퍼를 착용하였다. 화장실 칸에서 졸졸 나오는 물로 화장도 지우고 이도 닦았는데 수도 꼭지를 5초에 한 번씩 눌러야 해서 발을 닦는데 기묘한 요가 동작을 유지해야 했다.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통로를 걸으니 승객들이 이런 사람 처음 본다는 식으로 쳐다봤다. 그래도 찝찝한 채로 자고 싶지는 않았다. 다 씻고 나와 한껏 의자를 뒤로 젖히고 한국에서 공수해온 따스한 담요를 꺼내 덮으니 하루 쌓인 피곤이 한 번에 몰리는 느낌이다.
그리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