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CHAPTER 6: 프랑스 (4)

<한국을 사랑하는 프랑스 아저씨>

by 오셍

잘 마른 낙엽 냄새가 가득 한 공원이었다. 미세한 잔디의 움직임 까지도 잔잔히 부는 바람에 실려와 내 눈과 코와 귀를 스쳐갔다. 내가 천천히 걸을수록 더 오랫동안 나를 맴돌다 갔다.


“헐, 언니 저 비둘기 한 쌍 봐봐…… 무슨 사자처럼 생겼어!”
“여기는 비둘기마저 터프하게 생겼구먼……”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공원을 쭉 걷고 있자니 본의 아니게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린 세느강의 한 다리를 지나게 됐다. 형형색색을 띤 자물쇠가 다리에 걸려있는 것은 예사이고 더 이상 자물쇠를 걸 자리를 찾지 못한 후세대는 사슬이나 자전거 바퀴 자물쇠나 청와대 대문이나 잠글 것 같은 거대한 자물쇠를 연결해 그 고리에 다른 자물쇠를 연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자물쇠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러시아 인형인 '마트로시카' 같았다.

“이게 곧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사랑의 자물쇠 다리 구만?”


근래에 뉴스를 통해서 접한 소식이지만 70만 개에 달하는 자물쇠 때문에 다리가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듣기로는 자물쇠만 95톤에 달한다고 한다.
“응, 나도 읽었어. 이거 중국에도 있는데 도대체 누가 시작 한 건지 원..” 동생이 한심 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본 기사에서는 이 자물쇠들 제거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자물쇠 끊어질 때까지 사랑하겠다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후후 훗. 가까이만 있어도 쇠 냄새나는 거 같아” 내가 채운 자물쇠가 없어서 그런지 다리 한쪽을 징그럽도록 빽빽하게 채운 사랑의 자물쇠는 더 이상 로맨틱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녹슬어 가고 있는 흉물이고 태양이나 반사해서 눈을 쏘시는 고철일 뿐이다. 실제로 다리 밑에서 유람선을 타던 관광객이 떨어진 자물쇠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8957_956077134402297_1528269457742652173_n.jpg 무지막지하게 달려있는 자물쇠들… 눈이 아리다

아무튼 나 같은 사람 열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면 휘청하고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샤샤샥 지나오니 강을 등진 노점상들이 강 길을 따라 쭉 이어져 있었다. 헌 책도 팔고 엽서도 팔고 기념품도 팔고 사랑의 다리에 사용할 수 있는 하트 모양 자물쇠도 팔고 자신들이 직접 그린 그림도 파는 곳이었는데 바람이 차서 그런지 많은 상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듬성듬성 연 상점에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하면서 가고 있었는데 우연치 않게 태극기를 지붕 위에 달아놓은 노점을 발견했다.

1517414_956077257735618_4939375288188740379_n.jpg 편리하게 뚜껑만 열어 젖히면 가판대 탄생. 특히 그림이나 엽서를 파는 곳이 즐비했다.

“어?! 태극기다.. 태극기가 왜 여깄냐?”손가락으로 태극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물건을 진열하던 노점상 주인과 어떨 결에 눈이 마주쳤다.


“안뇽하쎄요~ 한쿡솨뢈 임뉘돠?” 웬만한 농구선수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큰 키와 그에 반에 홀쭉한 몸매, 파뿌리처럼 하얗지만 가지런히 정리된 머리카락, 얼굴은 오랜 세월 동안 기쁨과 슬픔이 타고 내려와 형성된 수많은 계곡으로 굴곡져 있었다.
“우와! 네네! 저희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말 잘하시네요?”
“하하, 꽘쏴홤니돠! 불어나 영어 할 줄 아세요?”
“네, 저희 둘 다 영어는 하구요, 전 불어도 좀 이해할 수 있어요.”
“와우~ 불어는 어떻게 배우셨어요?”
“네, 전 학교를 스위스에서 다녀서 불어를 배웠어요. 저희 언니는 필리핀에서 의대 공부 중이고요. 지금은 둘이서 유럽 여행하고 있어요. 프랑스가 세 번째 나라예요. 태극기가 걸려 있어서 너무 반가워요!”
“제 딸이 K-pop을 너무 좋아해서 한국에 푹 빠져 있는데 요즘엔 한국 대학으로 편입하려고 대학교를 알아보고 있답니다. 작년에 한국에 리서치 겸 다녀왔는데 서울은 정말 좋은 도시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지하철도 깨끗하고요. 한국에 갔다가 오면서 태극기를 사 왔어요. 그리고 저도 딸이 유학 가는 나라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글을 배우고 있답니다”
“따님을 사랑하는 게 느껴져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희도 파리에 오늘 아침에 도착했는데, 정말 매력적인 도시인 것 같아요. 노틀당 성당도 그렇고 세느강의 경치도 그렇고, 모든 게 정말 아름답고 조화로운 거 같아요.”
“오, 시간이 되면 저희 집에서 저녁식사 대접하고 싶네요! 저희 딸도 아주 좋아할 거예요. 저희 집이 이사를 해서 파리랑 조금 멀어졌지만 그렇기 멀지 않거든요.”
“정말 가고 싶은데, 저희가 오늘 저녁 독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해요.. 다음에 파리에 또 올 일이 있으면 꼭 들릴게요.” 정말로 오늘 저녁 기차를 7시간 타고 내일 아침 일찍 독일로 가는 기차를 이미 예매해 둔 상태였다.
“파리에 정말 짧게 계시나 봐요.. 낭만의 도시를 마음껏 누리고 가시지 못하신다니 유감이군요. 그럼 제가 e-mail주소 드릴 테니 파리에 오게 되시면 꼭 연락 주세요. 파리에서 기차 타고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답니다.”
그리고 손수 아내에게 종이까지 건네 받아 몽골 연필로 이 메일 주소까지 적으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알파벳 하나 하나를 읇어주셨다.

기차 타고 두 시간이라는 말에 잠시 얼이 빠졌다. 자고로 서울에서 대전까지 무궁화 호를 타고 간다면 2시간 걸린다.


“오, 어디 까쎄요?”
“에펠 탑에 찾아가려고요.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프랑스의 지하철은 아주 고약하죠. 냄새도 나고 서울 지하철 같지 않아요. 이왕 가실 거면 버스로 가시던가 걸어서 가는 게 최고죠!”

한국을 사랑하는 유쾌한 아저씨와 작별 인사를 한 후 어찌 됐든 아저씨가 알려주신 방향대로 걸어갔다.

다리 밑, 그러니까 유람선이 지나가는 그 옆에서는 예비 신랑 부부가 한창 웨딩 촬영을 하고 있었다. 강 바로 옆이라 춥기는 엄청 추웠겠지만 매 촬영이 끝날 때마다 얼른 자신의 정장을 벗어 덮어주는 남편을 보니 그깟 추위는 이미 그들의 사랑 앞에서 움추러 들었나 보다.

10888433_956077197735624_2279716485335622144_n.jpg 세느 강 근처에 있는 벤치에서 웨딩 촬영을 하고 있는 부부
11021248_956077277735616_2213711685923566172_n.jpg 헤밍웨이 오빠가 단골로 오셨다던 쉐익스피어엔 컴퍼니 서점. 영와 비포 선셋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세느강 사이를 지나는 수많은 다리들 중 하나 위에서 중절모를 쓴 중년 아저씨의 손가락이 강물을 거스르는 듯 아코디언 곁을 훑으며 세느강의 목소리를 대신 전해주었다. 그 음성과 함께 각 각의 노점상들이 자신 있게 걸어놓은 풍경화를 감상하고, 때론 노점상 앞에서 낡을 책들을 감상하고 있는 아줌마와 아저씨들 옆에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불어로 된 헌 책을 휘리릭 넘겨보기도 하고 괜스레 고개도 끄덕여 보았다. 보는 각도마다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나무 숲에 둘러 쌓인 노트르담 성에 감탄에 감탄을 하면서 쭈욱 걷다 보니 낯이 익은 다리 밑에 도착해 있었다.


“응? 설마 이거…… 인셉션에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