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까지 흔드는 긴 비행
비행 5시간 동안 병든 닭마냥 고개도 못 가누고 흔들리는 비행기를 따라 이리저리 머리를 박으면서 잤더니 모가지 근육이 찢어지는 느낌이 날 강제적으로 깨웠다.
'어머.. 이러다가 도착하기도 전에 목 끊어져서 죽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든 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예전에 ‘이소라체조’ 비디오를 보면서 따라 했던 스트레칭 몇 개가 아직 기억에 남아서 정말 다행이다. 내 목을 살리고 싶다는 간절함을 담아 동작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소화했다. 이동작은, 20분 동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승무원이 진정하고 물을 가져다 줄 테니 앉아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신이 좀 든 나는 아직 여행길의 반 밖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하면서 비행기 안에 있던 영화를 뒤적거렸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비행기는 중형 비행기였기 때문에 좌석 앞에 모니터가 있었다.) 옆 좌석에 앉으신 중국 아저씨가 코로 만들어내는 드릴 소리를 무찌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영화가 필요했다.
'다이 하드', 너로 정했다!
이 영화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브루스 윌리스의 숨 막히는 액션 씬에아저씨의 코골이까지 합해지니 장면들이 더 "극적으로"난잡하고 심각해 보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내 시계는 오전 8시를 가리켰지만 창문 밖은 아직도 희미한 별 빛만 보이는 밤이었다. 아마 날짜 변경선을 넘었나 보다.
후.. 하루를 더 사는 것 같은 기분은 좋지만 비행기 안처럼 폐쇄된 공간 속에서 보내는 긴 긴 밤의 연속은 내 시계의 초침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고 이 사실은 나에게 멀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입에 신 침이 고이고 손 끝이 차가워졌다. 3시간의 비행이 더 남았는데 큰일 났다. 어떡해서든 위액의 역류를 막기 위해 연속 하품 권법을 썼다. 하품 권법이 거의 힘을 다할 때, 승무원들이 아침 기내식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래.. 먹고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일단 먹고 보자.'라는 생각으로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억지로 삼키고 경건한 마음으로 아침으로 나온 오믈렛을 받았다.
아침은 김밥천국에서 김밥 한 줄을 담아주는 박스 크기에 오믈렛 하나, 소시지 하나, 허쉬 브라운 소 사이즈 하나가 들어있었고 개별 박스에 멜론 세 조각과 빵 두 개가 나왔다. 속이 매스꺼웠던 건 아마 배가 고파서였던 것 같다. 밥을 먹으니 다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명의 샘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허기진 배로 앉고 하는 비행은 당신의 건강을 해칩니다.
다시금 힘을 얻은 나는 2시간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 시간으로 오후 12시경, 네덜란드 시간으로 새벽 4시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5시간 동안의 경유 시간이 있었지만 길거리에 개미도 안 기어 다니는 추운 새벽 4시에 안네 프랑크의 집을 관광을 하자는 미친 생각은 고이 접어두선임 하게 공항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공항 직원들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커다란 촬영 세트 장에 들어온 것 같았다.
환승을 하려면 전자항공권을 뽑아야 하는데 당시에는 그 넓은 공항 어디에서 뭘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랑 같은 비행기를 탄 사람들도 그다지 절차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어떡하겠는가, 지금은 공항 직원이 한 명도 없는 새벽 4시다. 물론 속으로는 엄청 난감했지만 일단 '나는 스위스에 여러 번 와봤다'라는 표정으로 그 넓은 공항 안에서 당당한 워킹을 선보였다.
15분 정도 정신없이 당당하기만 한 워킹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노란 우편함처럼 생긴 전자 항공권을 출력하는 기계들이 나열돼 있는 곳에 도착했다.
태생부터 '전자’ 또는 ‘기계' 촌 년이라 또 다른 15분을 기계를 "탐험"하는데 사용해야 했다. 의지하면 한국인, 한국인 하면 의지 아닌가! 한 번의 실패와 15분의 사투 끝에 항공권 인쇄를 마쳤다.
마치 처음부터 이 딴 것 다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도도하게 그곳에서 나오려고 할 때,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나의 도움을 요청했다. 빨간 점퍼에 흰색 챙모자를 쓰고 키가 좀 작은 게 필리핀 사람일 것 같았다.
"저기, 항공권 인쇄 좀 도와주세요. 어떻게 하는지, 이게 안되네요" 유창하지만 약간 탁한 영어 발음으로 물어보셨다.
"아, 제가 해 드릴게요." 이미 여러 번의 시행착오로 내 티켓을 뽑은 나는 이번에는 승무원인 냥 아주 자연스럽게 티켓 인쇄 과정을 마쳤다.
가만히 날 보고만 있기가 그랬는지 그분이 내 국적을 물어보셨다.
"몽골사람이에요."
"네?"
"장난이에요. 사실은 한국 사람이에요. 북한"
"정말 요?"
이 분 갑자기 눈이 커진 걸 보니 북한 사람 처음 보시나 보다. 사실 나도 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에요. ㅎㅎ 필리핀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자칫 오해가 생길까 진실을 하나 더 얹어서 얘기했다.
"어! 전 필리핀 사람이에요. 다스마에 살아요. 어디서 공부해요?"
세상이 좁다 좁다 이렇게 좁다니! 그분은 우리 옆 동네에 사시는 분이었고 벨기에로 일을 하시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분도 아프면 우리 학교 병원을 가신다고 한다.
아무튼 피노이 아저씨가 곧 비행기를 타러 떠났기 때문에 한 시간도 안돼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넓은 도화지에 점 하나처럼.
그래도 와이파이가 터지는 공간에 앉아 큐티를 하고 1일 차 여행기를 쓰고 있자니 서서히 빛이 하늘을 채우고 사람들은 텅 비었던 공간을 채웠다.
비행기 날개에서 휴식을 취하던 새벽이슬이 다시 공기 중의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창문 쪽 좌석에 몸을 실었다. 엔진의 지휘를 따라 자유롭게 자신들의 음표를 그리며 연주를 하던 이슬은 긴 늘임 표를 만들며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유유히 자신들의 여정을 떠났다.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다시 보자꾸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