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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스더 May 21. 2024

성인 영화 번역의 애환


새내기 번역가 시절 머리끝이 아주 쭈뼛쭈뼛해지는 번역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거래처의 호탕한 대표님은 성인 영화가 들어왔으니 재미 삼아 해보라며 아주 긍정적으로 권하셨다. 그때만 해도 내 성 관념이 지금 같지 않았고 어떻게든 이력을 쌓아야 하던 초짜였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대마저 했던 것 같다.


어떤 영화일지 몰라도 대낮에 보기는 불편한 마음에 밤에 재생해 봤더니 말이 성인 영화지 삼류 pornography였다. 아빠와 딸, 계모와 아들. 정말 욕지기나는 연출들.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이런 영상물을 소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한글로 번역했으니 소비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일 텐데 내 나라 사람에게 문화 충격을 받은 느낌이랄까. 다신 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번역을 마무리했다.



사진: 테리 리차드슨



성인 영화 번역은 불쾌하다. 번역 실력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이력서에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후에도 의뢰가 한 번 더 들어왔는데 같은 회사 대표님이었고, 거절하는 내게 '다른 번역가들은 더 달라고 한다'라는 말도 하셨다. 정말일까. 물론 성인물이라는 게 대사보다 동작 위주라서 번역이 아주 쉬운 편이다. 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어떤 회사는 더 주기도 한단다. 그런 면에서는 좋다고 받을 수 있겠지만 성인물 영상은 “안 본 눈 삽니다” 그 자체여서 단박에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작년, 새로 계약한 미국 회사에서 의뢰가 왔다. 예의가 바르다 못해 넘쳐흐르는 미국인 PM은 이번 작업이 아주 민감할 수 있는 작업이라며 내가 불쾌할까 봐 걱정하는 글로 이메일 서두를 가득 채웠다. 대체 뭘까? 넷플릭스에 야동은 없으니 불쾌한 작업은 아닐 거라는 믿음으로 수락했다. 초장부터 일 골라 하는 느낌도 주기 싫었고.


일을 받아보니 다행히도 괴이한 영상물이 아닌 성에 대한 건강한 다큐멘터리였다. 적나라한 영상은 없으나 그래도 대사에는 19금 단어 일색. 하필 이 작업을 하는 날은 어린 조카가 우리 집에 놀러온 어느 주말로, 아이가 방에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부모 몰래 야동 보는 청소년처럼 자꾸만 창을 껐다 켰다... 죄짓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난 일하고 있을 뿐인데 성취감은커녕 죄책감이 따라붙을 뿐이었다.


성인물 번역은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이력이다. 앞으로 성인물을 번역하고 싶은 번역가가 있다면 당부 하나만. 자취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거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언제고 방문 열고 가족이 들어올 수도 있고,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새어나가는 소리는 어찌할 것인가? 아니, 뭘로 듣고 보든 그 비참하고 불쾌한 영상과 소리를 감당할 수 있다고?





영상 번역이 여초업계인 만큼 한마디 더 보탠다. 여성이라면 정신 건강상 성인물 번역은 패스하는 편이 좋다. 넷플릭스에 <핫걸 원티드>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성인 영화 배우들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다. 출연자 한 명이 직접적으로 말한다. 포르노 업계에 진출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세 달 해 보고 그만둔다고. 왜?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실제 촬영 장면에서는 여자들이 한없이 불행해한다. "우린 고깃덩어리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썩어빠진 표정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촬영을 중단한다. 그런 괴로움이 담긴 영상의 소비자가 되고 싶지 않다. 제작에 보탬이 되는 일은 더더욱. 그만 만나고 싶은 작업이었다. 돈을 많이 주는 것은 기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 작업은 애환을 넘어 비탄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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