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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스더 May 30. 2024

애인 같은 드라마

영상 번역가의 도피처


요즘 난 풋풋한 사랑에 빠진 어린 여자가 된 기분이다. 침대에 누워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기 붙들고 통화하며 시도 때도 없이 콩닥거리던 감정을 최근 드라마 한 편을 번역하며 느끼고 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어느 영상 번역가에게나 도피용 작품이 있다. 고대 히브리어가 나오는 종교 역사 다큐멘터리를 번역하다가 미국 하이틴 영화가 들어오면 어찌나 반가운지 요즘 진행하는 작품 중 독보적인 드라마가 있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매우 기쁘다. 필연적으로 영상물을 많이 접하는 탓에 쉴 때라도 미디어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커서 아주 오랫동안 드라마를 즐기지 못했는데 이번 드라마는 재미까지 있어서 일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덕업 일치의 정석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주인공 SNS를 찾아봤는데 내 번역 인생에 처음 있는 일. 그 정도로 정이 간다. 촬영과 편집, 번역이 동시에 진행되는지 제작 과정도 아주 스펙터클하다. 이렇게 빡빡하게 진행되는 방송계 시스템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덕분에 배우들 SNS에 실시간으로 뜨는 촬영 현장이나 비하인드 신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 드라마 주인공들은 우리나라에 골수팬들이 있어서 배우 스케줄만 떠도 팬들이 벌써 기대하는 눈치다. 괜히 사명감이 생긴다. 이렇게 배우들과 현지 관계자만 본 영상을,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드라마를! 대한민국 내 방에서 혼자 만끽하려니 이렇게 호사스러울 수가 있나.


초보 번역가 시절 나와 연차가 비슷한 번역가가 일에 정말 만족하며 너무 즐겁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을 정말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나도 덕업 일치를 꿈꾸며 이 일을 시작했지만 매일 다큐멘터리 번역만 하며 지쳐있었으니...


생각해 보면 그분은 정말 운이 좋아 이렇게 자기와 꼭 맞는 작품을 빨리, 많이 만난 게 아닐까 싶다. 이 드라마는 하루 한 편도 소화 가능할 정도로 대사 수가 적고 재미있어서 마음에 헛바람이 든다. 이런 드라마를 영국 모 회사 단가로 주 5회 납품하면 난 한 달에 누군가의 연봉을 벌겠구나. 그럼 영상 번역가도 부자 될 수 있는데! 그 꿈 내가 한번 이뤄보고 싶어지는걸.


하지만 이렇게 마음에 쏙 들고 편하기까지 한 작품은 몇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다. 아쉬운 만큼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려 한다. 그 주기가 더 짧은 번역가가 있다면 나에게 희망을 주길 바란다. 난 이렇게 즐겁게 번역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다. 그야말로 사랑에 빠졌다. 그래, 사람들이 이런 맛에 드라마를 보는 거였지. 재미있고 행복한 드라마를 자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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