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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Nov 10. 2023

저는 사람을 잘 용서하지 못합니다.

분노와 용서, 신뢰와 사랑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저는 주기도문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저에게 도덕적인 흠이나, 무례함을 보인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저의 분노와 용서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트라우마가 심하기에 '용서'라는 행위를 실행하지 못합니다. 참는 것과 용서는 다르다고 하지요. 저는 참는 인내심을 얼마든지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쉽지 않더군요. 사람을 용서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아직까지도 그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종교를 갖고 있음에도 사람을 용서한다는 건, 정말 하늘이 도와야만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는 무슨 뜻일까요. 사전적인 의미로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 뜻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가리옷 유다가  자신을 죽일 것임을 알고도 용서하셨지요.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저는 그게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무슨 뜻일까요. 좋아한다는 것과는 명확히 다른  같습니다.




그 사람의 단점과 실수를 넘어 잘못까지 덮어줄 수 있는 담대함은 단순히 좋아해서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해야만 하지요. 예수님은 교회 앞에서 잔인하게 도축한 가축들을 전시한 상인들, 그리고 도축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탄식하며 채찍질을 하셨지요. 저였다면, 아마 그 상인들과 도축업자들을 모두 죽였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셨지요. 사랑으로써 훈육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용서라고 머리로는 배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가 행하지는 못하겠더군요. 저는 아직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분노를 내려놓고, 제 스스로 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 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직 저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존감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지요. 아니요, 그 말은 틀렸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그토록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저는 확실히 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혐오하는 저의 모습이 간혹 튀어나올 때,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는 아직 깊이 사랑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저는 타인에게서 제가 싫어하는 모습이 보일 때면 참을 수 없이 분노합니다. 트라우마를 넘어서서 제가 싫어하는 모습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모습, 결단력이 없는 모습, 아이같이 떼를 쓰거나 고집부리는 모습, 기준을 강요하는 모습 등등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제게도 있기에 분노하는 거겠지요.




또한, 저는 울타리 안의 사람들만 편애합니다. 그러니까 울타리 밖의 사람들은 모두 적대시하고 적으로 간주하지요. 적들에게 공격을 먼저 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은 실리를 잘 따지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으나, 오히려 이 관점은 사람에 대한 편견이 심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 방어 기제가 선제공격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고, 중간의 태도만 취해도 되는 것임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제가 울면서 뼈에 새겨 넣은 경험들과 태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저를 소중히 생각해 주는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중간 태도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을 표면적으로 신뢰하되,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이더군요. 추상적이지만, 기본적이고 목가적인 신뢰 아래에 숨겨진 진짜 신뢰는 하지 않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상대방에게 진심을 다하되, 약점을 노출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신뢰와 사랑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저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랑하고 있지 않았음을, 자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신뢰해보려고 합니다.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법을, 중간의 태도를 보이는 방법을 차근차근 익혀보려 합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줄 만큼의 잘못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이건 제가 믿고 있는 신의 영역이기에, 그분께 맡겨드리려 합니다. 저는 분노를 건강하게 표출하는 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사회적 위치를 높이는 성공의 에너지로 삼는 법, 분노를 운동으로 표출해보려 합니다. 건강한 분노는 이런 것이라고,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제가 믿는 그분께 허락을 맡으려고 합니다.




쉽게 분노를 내려놓지는 못하겠습니다. 사람을 용서한다는 건, 뼈를 갈아서 만드는 일종의 거룩한 감정이자 행위가 아닐까요. 그 사람의 모든 잘못을 감싸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제 기준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저의 오만함이었음을 이제 조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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