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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Nov 11. 2023

저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고통스럽습니다.

미움에 대하여


"너는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저의 어머니는 제게 저 말을 종종 하십니다. 저는 저 말이 그렇게 싫더군요. 다른 관점으로 돌려보면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심성을 비꼬는 것 같아 오히려 어머니를 미워하게 되더군요. '그러니 주변에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 한 명이 없지.' 하고요. 오직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부모의 마음인데, 저는 어머니가 제 심성 자체를 공격하는 것 같아 그렇게 화가 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사람을 잘 미워하지 못합니다. 분노와는 다른 감정인데요. 분노는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는 과정을 100번 넘게 하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감정이라면, 미워한다는 건 그 사람의 상처에 박힌 큰 대못에 찔려서 아파하는 감정입니다. 오늘 저는 미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상처를 주면, 방에 틀어박혀 하루를 꼬박 나오질 않았습니다. 흔히 동물이 겨울잠 자듯이 이불에 파묻혀 울다가 잠이 듭니다. 어른이 돼서 생긴 버릇인 줄 알았는데, 어릴 때부터 있던 습성이었더군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거나, 상처를 주면 누가 제 심장에 대못을 박아 넣고 빼서 큰 구멍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저에게 사람을 미워한다는 건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그 구멍을 보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제겐 사람을 미워한다는  피를 보는 고통입니다.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은 제가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성별에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이끌리거나, 혈육 관계이거나   하나입니다.  그런 사람 있잖아요. 본능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요. 연인에게 갖는 감정과는 사뭇 다릅니다. 정말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거니까요.




이상하게 저는 그런 사람들만 솎아내어 제 울타리 안으로 가둬 놓습니다. 그래서인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제게 큰 실망감을 주거나, 그 사람이 상처에 거꾸로 박힌 대못으로 무의식적으로 저를 찌를 때면 그렇게 고통스럽습니다. 처음 종교를 갖고, 엄마를 미워하게 되어 꼭두새벽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만 미워하게 해달라고, 저희 엄마를 악에서 구해달라고요.


제 소꿉친구가 똑같은 실수를 하면서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볼 때, 저는 그 친구를 미워하더군요. 화가 나서 미움에 사무친 말들을 내뱉고는, 그 친구의 사과를 받고 난 뒤에 저는 혼자 남몰래 웁니다. 그 친구에게 그런 말들을 쏟아낸 게 정말 미안해서요. 이렇게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갖게 되면 피를 뿜어대는 것처럼 아파합니다.




분노와는 현저히 다릅니다. 분노는 저 과정들을 이미 100번 이상, 어쩌면 1,000번 이상 반복하고 생긴 끓어오르는 화산 같은 감정이고요. 그 분노가 제게 편견을 보인 사람들, 저를 무시한 사람들, 그리고 제 부친과 친형제에게 향해 있습니다. 실망과 미움 때문에 수천 번을 피를 뿜어대고는 생긴 감정이지요. 가라앉히기 쉽지 않은 감정입니다. 제게 분노라는 감정은 이렇게나 깊은 의미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부터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제게 이런 감정을 줬을 리가 없다는 것을요. 초코파이를 준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게 된 지하의 작은 개척교회에서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온화한 예수님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 눈빛이 아직도 생경합니다. 아마 그때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저를 참 아낀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분노에 휩싸여 제 본성을 잊고 지냈습니다. 몇 년간 제 본성은 분노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이용하려 했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쓰러져 자다가 번뜩 깨서 어제 제가 쓴 글을 찬찬히 읽어봤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몇십 분의 오열이 끝나고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제 본성은 이런 게 아니었음을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정말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롤모델이었던 교양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그 교수님은 정말 멋있는 분이셨거든요. 저는 그 교수님을 인간적으로 정말 좋아했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부단히 노력했고, 잘 따랐던 교양 교수님이었는데요. 이상하게 어느 날부터 그 교수님은 인신공격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심지어 선배들 앞에서 제 부모를 욕하기도 하고, 제가 노력한 과정이 아무것도 아님을 폄하하더군요. 저를 공격하는 건 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을, 그리고 모욕감을 주는 건, 그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부터 제가 그 교수님이 관장하는 일종의 과외 같은 모임에 아프다고 안 나가기 시작하더군요. 그 교수님이 말하는 것처럼 제가 게을러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니요, 그건 아버지께서 나가지 말라고 하는 신호였습니다. 그러다 선배들이 저와 어머니를 불러 저희 어머니에게 모욕을 주는 것을 보고, 그 교수와 따르는 남자 제자들을 상종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금 같은 성격이었으면 바로 테이블을 엎거나, 그 낯짝들에 침을 뱉었을 텐데, 아쉽긴 하지만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 교수를 롤모델로 삼았던 걸 후회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할 위인의 롤모델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개척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참 웃기죠? 같은 신을 믿는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꽤나 우스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개신교 신자들을 혐오합니다. 맹목적인 믿음, 신을 자신의 방패와 창으로 삼는 자들, 신을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더군요.




그리고 천주교를 무시합니다. 기독교 역사적으로 천주교가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고요. 게다가 신부님의 존재를 무시합니다. 신과 자신의 대화에 감히 인간이 끼어든다면서 말이죠. 신부님은 사실 본인들의 목사님인데 말이죠. 그렇게 치면 목사들은 왜 있습니까? 그냥 조용히 기도하면 될 것을. 그 목사들도 온갖 악행을 저지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불교도 무시합니다. 사람들은 종교 제사를 관장하는 사람의 존칭을 님을 빼고 잘 부른다면서요. 그중에서 목사와 신부는 님을 빼고 잘도 부르면서, 불교의 스님은 스라고 부르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상생과 공존을 모르는 자들이 개신교 신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편견이 매우 강합니다. 건강한 개신교 신자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제발 그런 사람이 나타나서 제 편견을 부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신을 이용하는 게 눈에 보여 악취가 나더군요.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습니다.




그러다 어제 쓴 글을 보고 제가 눈물을 흘린 이유가 생각났습니다. 그 교수 아래에서 같이 고생했던 선배를요. 온갖 성차별과 모욕과 가족을 욕하는 그 악행을 견딘 그 선배도, 저와 같은 방법으로 점차 나가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해방된 그 선배를 보며 처음에는 한심해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 모임에 참석할수록 힘들어하는 저를 불러 밥을 사주기도 한 그 선배에게 참 깊은 고마움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영혼과 자아가 썩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뛰쳐나온 그 썩어빠진 모임은 언젠가 크게 한번 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또 깨닫게 되네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잊고 있던 제 심성을 다시 알려주시는 것을요. 아버지의 은총 아래 인간적으로 정말 좋아했던 그 선배에게 가진 고마움을요. 미워하지 말라고, 늘 그렇듯이 실수 두 번쯤은 덮어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네요.



오늘도 저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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