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시킨 N가지 사건은? - 성인 편
다음 변곡점은 내가 대학생 때 왔다.
한창 푸릇푸릇하고 찬란한 희망을 갖고 공부할 대학생이 난 항상 가정사에, 그리고 엄마에게 시달려야 했다. 집 안에서 늙은 남자와 싸우고, 나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한 엄마는 끝을 몰랐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연히 교양 수업을 듣다 문화콘텐츠라는 학과에 관심이 생겨, 처음으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의 반응은 네가 나중에 돈 벌고 여유가 생기면 가라는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머리도 좋지 않은 친오빠한테 서울대생 과외도 시켜줬으면서 왜 나는 대학원도 못 보내냐는 원망과 함께 청개구리 심정으로 그 공부에 더 집중했고, 교양 교수님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조수처럼 일하던 선배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면서 내 가정사도 털어놓게 됐다. 하지만 그 선배들은 공감하는 척만 하며 순진한 나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유일한 홍일점이었던 내가 오히려 그 선배들을 꼬신다며 같은 여자였던 교수님에게 쫓겨났다. 그 선배들은 나를, 그리고 우리 엄마를 무시했고, 그런 태도는 교수님도 마찬가지였다.
내 엄마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왜 타인에게 들어야 하지? 내 가족은 나만 욕할 수 있는 버튼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내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드는 ‘발작’ 버튼이다. 그런 비정상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보고 그 사람들과 연을 끊었다. 나는 인간들의 군상을 보며 하나 배운 것이 있다. 절대 저들처럼 위선적으로 살지 말고, 늘 앞과 뒤에서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되자고. 어떤 형태의 가족이라도 가족은 내 가족이니 모욕되게 하지 말자고.
내 인생에서의 마지막 변곡점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그때의 엄마와 내 사이는 최악이었다. 엄마가 그 늙은 남자와 정말 끝내고 싶다며, 외할아버지 댁 근처로 이사하자고 조르기 시작해 어쩔 수 없이 나는 대출을 받았다. 그렇게 엄마와 내가 발품을 팔며 작고 아담한 집을 고생 끝에 얻었는데, 그 새끼가 또 우리 집에 오다니. 게다가 그 새끼 무릎에 물이 찼으니 이 집에서 요양하게 하자고? 난 그 순간 눈이 돌아 물건을 부수고, 엄마와 육탄전을 하고, 엄마의 옷을 다 찢어버렸다.
한 번만 더 내가 얻은 내 집에, 내가 세대주인 집에 그 새끼 발을 한 발자국이라도 들여놓는 순간, 고소해버리겠다고. 그때는 부모고 나발이고 없다며, 내 집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으라며, 한 번만 더 그 소리 하면 집에 불 지르고 나도 자살해버리겠다며. 자식새끼 인생 그 정도로 말아먹었으면 미안한 줄 알라며. 내가 누구 때문에 대학원을 못 갔는지 알지 않냐며. 그 정도로 발목 잡았으면 제발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며 엄마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그런 폭력적인 나를 본 엄마는 충격이 상당했는지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엄마가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됐다 싶어, 이참에 연을 끊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다 숙취에 절어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난 어느 날 아침, 엄마가 내 방 창문을 두들기며 문 좀 열라고 소리쳤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장례식장에 빨리 가봐야 한다며 울부짖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술이 깼다.
서둘러 짐을 챙겨 장례식장에 가보니 정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더라. 기가 막혔다. 요양 병원에 계시는 동안 딱 한 번 가고, 그 이후로 가보지도 못했는데. 할아버지의 약한 모습이 너무 가슴이 아파 가지도 못 했는데 정말 돌아가셨더라. 염을 하고 수의를 단정히 입고 무릎이 굽어진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더 가슴이 미어져 왔다. 나는 이제 돈을 벌기 시작해, 이제야 좋은 걸 다 사드릴 수 있는데 정말 먼 곳으로 떠나셨다.
화장터에 가기 전, 연락을 끊었던 친오빠에게 장례식장 주소와 한 마디의 카톡만 남겨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여기로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그리고 답장은 하지 말라고. 결국 친오빠는 오지 않았고, 큰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아기가 아직 신생아라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더라. 개 같은 놈. 배은망덕한 천하의 쌍놈의 새끼. 지 자식새끼만 중요하고, 가족한테 받은 사랑 다 무시하는 버러지 같은 새끼. 결국 그렇게 살다가 외롭게 뒤져 버려라. 내 친아빠가 죽어도 장례식장에 절대 가지 않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며 더 이상 친오빠를 내 형제로 취급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다 마치고, 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되는 대로 살다가 나중에 할아버지를 뵈면 나는 얼굴도 들지 못하겠다 싶어 더 열심히 일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둘씩 해냈다. 그렇게 살아 보니 성취욕이 생겨 나 스스로가 더 자랑스러워졌다.
살면서 누구나 힘들 때가 온다고 한다. 아홉수 뭐 이런 표현들로 말이다. 친한 친구들에게는 항상 내 인생은 재미있다며, 정말 파란만장하지 않냐며 농담을 던지곤 한다. 그렇게 내 인생을 해학적으로 표현해 봐도 나에겐 인생은 늘 힘들고, 내가 딛고 일어서야 할 저 높은 산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으로 사주를 보니 내가 초년 운이 정말 좋지 않다고 한다. 우연히 만난 관상 잘 보는 택시 기사님은 내 관상을 보시고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지만, 능력이 좋아 중년, 말년 운이 좋다고 하더라.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싶어 그 택시 기사님의 말을 믿고 싶다.
나는 그만큼 돌려받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피나게 노력하고, 투쟁해왔으니 이 정도는 하늘도 눈감아 주겠지. 앞으로 더 투쟁하고 열심히 살아갈 예정이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나는 어떤 일이든 해결해 낼 자신이 있고,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다. 어느 날 어르신이 내게 누구 딸이냐고 하면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제 외할아버지, 서가 상배의 딸입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