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간을 너의 돈과 바꿀 수 없어

취업 제안을 거절한 이유

by 시원

2023년 8월에 퇴직을 했다. 프리랜서 비슷한 생활을 하다가 마흔 언저리에 취직을 했으니 15년 남짓 조직에서 일을 한 셈이다. 40대 초반, 아이는 웬만큼 컸고 나는 꾸준히 할 수 있는 일과 사회적 성취가 필요했다. 출산과 육아 때문에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을 얻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다음에는 신나고 정신없이(이 기간이 가장 길었다) 일을 하다가 퇴직하기 약 1년 전부터는 지친 마음을 달래 가며 버텼다. 퇴직을 하니 날아갈 것 같았다. 일말의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아니, 돈. 돈이 아쉽긴 했다.




때가 되면 통장에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 사라졌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못) 쓰는 거지. 다소 대책 없는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는 터라 처음에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퇴직하고 1년 정도는 소소하게 용돈을 벌 수 있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남편도 퇴직을 하고, 용돈 벌이도 여의치 않게 되자 궁핍함이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집 밖을 나서면 돈 쓸 일이 천지였다. 휴대폰만 켜면 집 안에서도 소비를 부추기는 자극적인 광고에 온종일 노출되었다. 그런 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골주점에 가는 횟수가 서서히 줄어들거나, 먹고 싶은 것 앞에서 멈칫하는 모습을 자각하게 되면서 소득이 없다는 현실이 실감 났다. 아, 돈이 없구나. 다시, 돈을 벌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던 즈음에 함께 일했던(정확하게는 상사) K가 일을 제안했다. 연봉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다시 생각해 달라는 두 번째 제안도 거절했다. 분명 돈 벌 궁리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솔직히 K의 제안이 반가웠다. '와~아직 살아있네' 하는 느낌도 들었다. 다시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무엇을 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돈을 대가로 다시 나의 소중한 시간을 저당 잡히게 된다고 생각하니 갑갑함이 밀려왔다. 돈값을 하려면 이런저런 스트레스도 감당해야 할 것이었다. 조직생활의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후배들에게 위로랍시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네 연봉이 그 스트레스값이야. 다시 9-to-6로 출퇴근하는 삶을 상상하자 숨이 막혔다. 소소하게 준비 중인 몇 가지 계획도 떠올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고 읽지 못했던 수많은 고전과 독서모임, 집 정리, 짧은 여행 같은 소소한 것들. 이런 시답지 않은 것 때문에 K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하면 정신이 나갔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실제로 남편은 은근하게 일을 종용했다). 아직은 살만하군. 돈 없다는 소리는 엄살이고 실제로는 절박하지 않은 거야, 누군가는 비아냥 거리기도 하겠지(실제로 친구가 그랬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고 싶은 것을 미루고 싶지 않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제는 일을, 더 정확하게는 다른 사람의 일을 하기 싫다. 첫 번째 거절을 하자 K는 제안한 일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보다는 나에게 이로운 일을 선택하며 살고 싶다.




환갑이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이런 기회는 없을 것이다. 계속 통장의 잔고를 살피고 작은 지출에도 신경 쓰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내가 미쳤지 부를 때 냅다 달려갈 걸 하며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로 다른 사람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 조직의 목표에 봉사하는 일은 안 하고 싶다. 나에게도 일이 필요한 시기가 있었고, 적절한 시기에 능력껏 일했다. K는 성과를 내면서 열심히 일했던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이제 그렇게 일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다시 일을 시작한다면(그런 날이 올까?),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기획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의 시간은 돈과 교환되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이 안락한 시간을 타인의 돈과 맞바꾸기 싫다. 나를 위한 노동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다가 우울해진 마음을 굳은 결심으로 다잡는다. 내 시간을 정말로 나를 위해서 써야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미친 듯이 잘 놀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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