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 독서모임
종종 생각한다. 책을 읽는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을지.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 먹고사는 일에 지쳐 책을 읽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생각은 뒤엉키고 말이 거칠어졌으며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위기감이 덮쳤을 때 책을 펼쳤다.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하루하루를 독서로 버텼고, 나는 내 안팎의 나쁜 것들로부터 나를 지켰다.
퇴직을 하고 난 후(아니, 그전부터) 독서모임을 꾸리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막연하게 여럿이 함께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책을 매개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가 들면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무척 소중하다. 그래서 마음을 그저 마음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밖으로 펼치고 싶어 진다. 마침 동네에 예쁘고 소박한 책방이 문을 열었던 터라 나는 대략의 독서 모임 계획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대표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유쾌한 책방 대표님과 면담 후에 독서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모임은 두 명, 나까지 세 명이 함께 했다. 몇 명이 신청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미리 선정한 책을 읽고 격주에 한 번씩 만나서, 관련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해진 주제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 오갔고, 틈틈이 서로 추천해 주는 책을 읽기도 했다. 한 명이 참석하지 못할 때는 둘이 모임을 하기도 했다. 멋쩍기도 했지만, 책을 매개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늘 있었다. 첫 모임을 마무리하고 책방 대표님과 두 번째 모임을 계획하던 중에 세대를 한정해서 모임을 진행해 보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독서모임 이름을 '질풍노도 5060 독서모임'이라고 붙였다. 그리고 이런 안내 문구를 올렸다.
사십 세가 되면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항상, 늘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혹은 요원했고, 해가 거듭되어도 마음은 종종 질풍노도 같기만 합니다.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고 싶습니다. 성장은 아이들이나 청소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니까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5060 세대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함께 성장해 봅시다.
지금까지 저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과 두 시간 남짓 활활 발발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쭈뼛거리며 말을 아끼던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대화에 참여하면서 함께 읽은 책에서 자신의 감정과 맞닿은 부분을 찾아내 이야기했다. 여전히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매는 마음과 가족과 타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어지러운 마음,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고단함과 여전히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마음을 말한다. 모임이름 때문인가.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굳이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선정한 책을 인생책이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책은 진짜 별로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모임을 시작하면서 나는 참가자들이 서로에 대해 충고나 비판, 평가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나의 우려가 무색하게 참가자들은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상대의 의견을 평가하지도, 독서를 무기로 자신의 지식을 뽐내지도 않았다. 이런 태도가 나이에서 오는 세련됨인지 독서의 힘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점점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모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질풍노도 독서모임. 한낱 독서모임에 왜 이런 타이틀을 붙인 걸까. 내 마음의 반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아 설레기도 하고, 반면에 나이 들어가는 것이 불안할 때도 있다. 나이가 들고 몸이 늙으면 마음도 따라 늙으면 좋으련만 왜 마음은 늙지 않고, 감정은 사그라들지 않는지 야속할 때도 있다. 이런 나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질풍노도는 어느 한 시기의 특징이 아니라 인생의 전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가 거듭되어도 마음은 종종 질풍노도 같기만 합니다.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고 싶습니다."-- 어찌 보면, 안감힘 같은 말이지만 질풍노도하는 한 성장의 가능성도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저 안내 문구의 무게는 '성장'에 있다.
독서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무럭무럭 자라서 똑똑해지고 싶고, 무럭무럭 자라서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싶고, 무럭무럭 자라서 굳건한 나의 자리를 만들고 싶고, 무럭무럭 자라서 좋은 이웃이 되고 싶은 마음. 그 마음 한 자락에 기대어 나는 함께 읽을 책을 고르고, 읽고 또 읽는다. 독서를 자신의 삶과 관련짓는 능력자들 덕에 나는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수시로 얻는다. 나빠지지 않기 위해 책을 읽던 나는 이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독서모임에 간다. 거기서 여전히 질풍노도와도 같은 마음을 외면하고 잠재우기보다 그때그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며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친구들을 만난다. 독서는 갈팡질팡하는 우리가 나빠지지 않도록,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길을 잘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독서모임은 그것을 여럿이 함께 하며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리고 나는 독서모임을 왜 그렇게 하고 싶어했는지 알게 되었다. 즐거운 것이다. 여럿이 함께 길을 찾아가는 일이, 그 길에 손톱만큼의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이. 나이가 들어도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