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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Oct 13. 2022

住생활

당신의 공간에 초대해 주세요

따님.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예요. 출근해서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아침 산책을 합니다. 저에게 아침 산책은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사무실이라는 공적인 공간으로 이동할 때 숨을 고르기 위한 완충지대 같은 것이에요. 오피스 상황에 맞는 상태로 심신을 조율하는 일련의 준비 과정이라 할 수 있지요. 산책을 하다 보면,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러다 보면 내가 일하는 곳이 각별하게 느껴져요. 대학의 캠퍼스는 참 아름다워요. 시간의 변화가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어서 같은 장소를 산책해도 계절에 따라 다른 느낌과 감상에 젖게 되지요. 퇴직을 하면 아마도 아침 산책 길이 가장 많이 생각날 거예요.


오늘은 기숙사 방향으로 산책길을 잡았는데, 근처에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더군요. 첫 번째 든 생각 아, 길을 잘못 잡았다. 두 번째 든 생각은 아, 개강이구나. 학생들이 기숙사에 입소하는 기간이구나. 그리고 세 번째, 따님의 대학 입학의 기쁨을 뒤로하고 방을 구하러 대학가를 전전하던 오래전 그때가 떠올랐어요. 어렵게 구한 성북동의 수녀원 기숙사는 몸 하나를 간신히 뉘일 수 있는 정도였지요. 그 마저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이후 따님은 졸업할 때까지 세 차례 방(집이 아닌!)을 옮겼는데-한 번은 하숙, 두 번은 역시 원룸-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고백하는데 하숙을 하던 작은 방에서 함께 자고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릅니다.


이 서글픔은 취업을 앞두고 다시 방을 구하기 위해 서울 시내를 전전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오히려 더 참담했다고 할까요.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버티고개 근처 오래된 집의 방 한 칸이나 신림이나 봉천동의 어둑한 원룸밖에 얻을 수 없었습니다. 처참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나, 제 마음이 따님에게도 전달이 되었겠지요.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보자, 하고 지금 따님이 살고 있는 집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노부부가 살던 공간은 낡은 살림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나 있었지만, 정리를 하면 소박하게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가끔, 한겨울에 따님의 손을 잡고 서울 변두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따님. 어렵게 구한 지금의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어떤 공간은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공간은 내가 의미를 부여한 공간이고, 내가 가꾼 공간이지요. 그리고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꿔나가다 보면 내가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늘 혼자만의 방을 꿈꿨어요. 단출한 책상 하나와 좋아하는 몇 권의 책이 놓여있는 그런 방이요. 이런 욕망은 한 번도 부모가 있는 곳을 떠나 자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기도 해요. 일가친척들이 늘 찾아오는 집, 어른들의 관심과 시선이 항상 존재하는 집, 내 마음대로 공간을 가꿀 수 없는 집. 지금까지도 저를 둘러싼 환경입니다. 혼자 머물 수 있는 소박한 방에 대한 욕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적지 않은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집 근처에 혼자만의 작은 서재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 공간에서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때로 빈둥거리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공간이지요. 그 공간에서 나는 그저 나로 존재합니다.


나의 서재, 나로 존재하는 공간


공간에 대한 따님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요. 얼마 전 따님이 그런 말을 했지요. 요즘은 집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이 즐겁다고요. 즐겁다고 했던가, 청소를 잘한다고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아무튼 살고 있는 공간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산다는 따님의 말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따님이 정리정돈을 잘하면서 살지는 않았잖아요. 어쩌다 따님의 공간을 방문하면..., 말을 않겠습니다.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며 지낸다는 따님의 말을 저는, 따님이 스스로의 생활을 가다듬기 시작했다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참 반가웠어요. 어떤가요. 따님의 취향에 맞게 정리를 시작해 보니, 따님이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으신가요?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으신가요? 집 청소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깨끗하고 정돈된 환경이 주는 편안함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이죠.


저에게도 변화가 생겼어요. 예전에는 서울에서 업무상 회의가 있거나 모임이 있을 때 으레 껏 따님의 공간에 머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지금은 숙소를 따로 잡아서 혼자 지내는 시간을 만끽합니다. 따님의 공간에 들어가야 할 때는 따님에게 양해를 구하지요. 진즉에 그랬어야 했어요.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던 것은 따님을 여전히 어린 아이로만 여기며 돌보고 간섭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던 탓이니 너그럽게 봐주세요. 따님의 삶을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듯이  따님의 공간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갑자기 따님 방문을 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가끔 따님의 공간에 초대해 주세요. 그날의 청소와 정리 정돈은 제가 맡을게요.



그나저나 주인이 집세를 올려달라는 소리 안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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