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까? 요즘 무슨 일만 하면, 이 질문이 머리 곳곳을 채운다. 채울 틈이 없는 지경에 다다르면 ‘왜 살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는 한다. 이런 생각을 처음 해본 건 아니다. 수험생활 당시에도 이 생각을 했었지만, 눈앞의 급한 불인 수학능력시험이 더 중요했기에 이 문제를 가볍게 넘겼던 것 같다. 이제야 의문점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을 생각해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우리가 살아온, 살아갈 시간이 큰 틀 안에서의 틀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큰 틀’에 대해 정의하자면 ‘몇 살 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라는 현대인에게 통념적으로 정해져 있는 삶이다. 예를 들어 초, 중, 고등학교에 다녔던 12년은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작은 틀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정해진 나이에 초, 중,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간다. 대학은 취업을 위함이고, 이는 가정을 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죽는다. 우리는 왜 이렇게 정해진 틀 안에서 살까?
“왜 살아?”라고 물어보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라고 멋쩍게 웃는 사람과 불연속적인 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불연속이라 함은 모두에게 답이 될 수 없는, 본인에게만 적용되는 답을 말한다.
“가족을 위해 살지. 가족한테서 받은 것들을 보답해야 하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해.”
“그럼 그 후에는 죽어도 돼?”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살고 싶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다하게 되면?”
“또 하고 싶은 게 생기겠지.”
“하고 싶은 게 없어지면? 그땐 죽어도 돼?”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건, 계속 살아가고 싶은 거 아니야?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거지.”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불연속적인 이유 안에서는 주어진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전제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하겠지만, 살고 싶어 한다면 굳이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그냥 사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중 ‘즉문즉설’이라는 코너에서 법륜 스님이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어서 가져와 보았다. “사람이 하루하루를 사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어요. 그냥 사는 거죠. 풀이 자라는 데 이유가 있나요?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 없잖아요.”라는 말씀이었다. 덧붙여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삶이 즐거워지거나, 괴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휴가 때 하는 등산은 즐겁지만, 군대에서의 행군이 괴롭게 느껴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컵의 반이 물로 차 있을 때, 이를 보고 “반이나 남았네.”와 “반밖에 안 남았네.”라는 2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관점이 다르면 상황을,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달라진다.
나는 의미 있는 시간을 채워가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필요하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하지만 관점을 전환하여 ‘살아가고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떤가? 이 세상에 본인이 살아가는 이유에 있어서 틀린 답은 없겠지만, ‘왜?’보다는 ‘어떻게’라는 물음을 넣는다면 구도가 훨씬 더 정교한 답안이 나올 것이다.
왜 사는지에 대해 고민하다 막막함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살아가는 이유를 생각하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는 게 어떤가? 이왕 주어진 하나뿐인 삶을 보람 있게 구성하여 본인에게 선물해주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