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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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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Jun 27. 2023

순애(殉愛/純愛)

나와 하연

40.

사실, 방송부에 들어가는 건, 내 계획에는 아예 없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부에 들어갔던 건, 아무래도 할매의 영향이 가장 컸었다.

내가 정아와 헤어지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그러니까 대략 1월 말 즈음부터, 할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할매가 처음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는, 반나절 정도 병원에 있다가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쓰러진 건, 2월 초였고, 두 번째로 쓰러졌을 때는, 병원에서 퇴원을 시켜주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할매를 병원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병실에 입원시켰다.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병원에 직접 오지는 못했다. 할매는 몸집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침대에 누워, 아버지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할매가 입원한 이후로, 나는 침대 옆에 간이침대를 펴 놓고, 병실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할매는 내가 이런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가끔씩 병실에 들릴 때면, 아버지는 나에게, 50~60만원 정도의 현금을 쥐어주고 갔다.

이 돈을 받을 때면, 나는 할매의 손자가 아니라, 아버지 회사의 직원이 된 기분이 들었다. 썩 좋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쓰다가 부족하면 전화해라.

  -됐어요, 안 부족해요.

아버지도 나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지, 내 어깨를 한 번 가볍게 쥐었다 폈다.

  -이번에 하는 일만 끝나면··· 아빠도···

  -그전에 잘못되면요?

아버지의 멍한 눈이, 잠시 또렷이 흔들렸다. 잠시 날 바라보더니 무어라 운을 떼려다, 아무런 답변을 내주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흐릿했던 아버지의 눈이, 예전에 내가 어항에서 보았던 물고기처럼 보였다. 당시의 아버지도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을까. 그랬다면, 아버지를 더더욱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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