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와 서울밤

나와 순애

by 평일

139.

순애가 떠나고 화장실 청소를 한 날엔 내가 쓰는 것과 다른 색 깃발이 꽃혔다. 영역에 관한 문제였다. 순애가 나에게 뿌린 향수가 일종의 구두계약이었다면, 방금 컵에 꽂은 빨간 깃발은 가장 개인적이었던 공간이 공용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계약서에 찍힌 도장인 셈이었다.

조금씩 쌓여가겠지. 이런 의미심장한 물건들이, 내것이 아닌 순애의 것들이. 옷가지나 길쭉한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

순애의 개성이 잔뜩 담긴 것들이.

그런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겠지. 그 여자애 것에 나의 향을 묻히고 나의 것에 그 여자의 취향을 묻히며.

함께 오래 볼 수 있겠지.


+

바닥에 뜨거운 물을 뿌리는걸로 청소를 마무리한다.

거울에 김이 뽀얗게 서려있다 간만에 거울도 닦기로 결심했다.

눈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 다음은 코와 귀 입술.

간만에 뜯어본 내 얼굴에 반가움을 느꼈는데, 거울 속엔 암마가 있었다. 너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듯

나 그 여자를 닮았네.

코가, 각진 귀 모양이, 한 쪽으로 있는 쌍커풀이 그렇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여자랑 닮아버렸네.


140.

이 시점에서 했어야만 했던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순애로부터 "무엇을 원하는가"

나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동경으로 불안한 완벽으로 불안전한 완벽함에 대한 실망으로 종말로. 보통의 관계는 시계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나는 그 여자애를 동경했고

그럼 나는 그 여자의 어떤 부분을 동경하는지. 왜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지.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는지. 조건 없는 사랑?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그거 되게 어려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또 한 번 생각.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깊어졌고. 옆에 아귀랑 무섭게 생긴 물고기들이 보일 만큼 명도가 낮아졌을 땐 맞아.


그랬지, 그랬었지. 하고 있던 생각이 바꼈지.

시작할 땐 시작한 관계로, 끝날 땐 끝난 관계로. 어쨌든 너와 내가 일종의 관계로 묶여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지.

그 여자의 기억속에 남을 것이라면, 만약 우리가 평생 보지 못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 최악의 인상으로 남기로한다.

나쁜 기억은 파괴력이 강할 뿐더러 전염성까지 강하니까. 암세포처럼 조금씩 야금야금 전염 시키며 온통 내 기억으로. 내 기억으로만

아니 생각해보니 모든 걸 원했다. 순애의 모든 걸. 너가 하는 생각이나, 떨어뜨리고 간 향기나, 흘리는 피와 끝없는 갈증 그리고 내뱉는 날숨까지도. 모든 게 나에게로 종속 되었으면 했다. 담쟁이 덩쿨처럼 내 몸을 칭칭 둘러 감고 기생하길 원했다.

일방적인 의지를 원했다. 나로부터 오직 나로부터만.

아 돌이켜보면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애초에 단 한 곳뿐이었다니까.

끝도 없는 바닥으로, 탁 트인 길로. 저멀리 종말로.


141.

- 정말로?

- 그렇다니까요. 전 일주일 동안 타코야끼만 먹어도 행복해요.

- 나는 타코야끼 별로 안 좋아하는데.

- 아니야 생각해보니까 안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싫어하는 수준인가봐. 생각하니까 속이 안 좋네.

- 어떻게 그걸 싫어할 수가 있지.

- 그 질퍽거리는 식감이 너무 별로라고 해야 되나.

- 그게 매력인데요.

- 나중에 커서 타코야끼 가게 차리면 되겠다.

- 에이 전 절대 그렇게 못 만들어요.

- 왜 많이 하다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걸로만 남기려구요. 진지해지면 그게 싫어져.

- 오 좀 어른 같은데?

- 그런 의미로 오늘도 자고 가시죠.

- 그러려고 했어.

- 일어나선 맛있는 브런치를 먹으러 갑시다

- 그건 어렵겠어. 아침 일찍 출근 해야 하거든.

- 내일은 토요일인데요.

- 먹고 사는데 주말이 어딨니.

- 오 좀 어른 같은데요?

- 좀 멋있어?

- 칭찬은 아니었지만요.


142.

그 애는 어둑어둑 해가 질때면, 달처럼 고개를 빼꼼 내밀고 우리 집에 찾아온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가끔은 아니고 많이 보고 싶어질 때면, 갑자기 제멋대로

그러니까 내가 가질 수 있는 순애의 시간은 하루를 대각선으로 잘라 반.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않는 날에는 그 반을 다시 접어 자른 반.

강아지는 주인이 돌아오는 시점을 집에 남아있는 주인 냄새의 농도로 예상한다고 하던데. 그런 면에선 나도 흔들 꼬리 없는 강아지랑 다를 게 없네요. 불쌍한 강아지. 온종일 주인만 기다라고.

오지않는 주인님를 기다리며 반려동물을 기르지 않기로 다짐해요. 해가 고개를 떨구면 심장이 두근거리죠.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흔들 꼬리가 없는 게 다행이네요. 있었다면 기다린 티 나서 얼굴이 붉어졌을텐데요.

- 왔어요? 좀 늦었네요.

- 오늘도 고됐다. 참

- 저도 오늘 너무 힘들었는데.

- 너도 그랬어? 오늘 통하는 날이네.

- 언젠 안 그랬나요.

- 한 대 필래?

- 좋죠.

- 보헴? 담배 바꿨네요.

- 응, 얼마전에.

- 6mm네요. 건강에 안 좋을텐데.

- 세상에 건강에 안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 뭐하다가, 이제 와요.

- 이것저것.

- 이것저것 뭐?

- 그냥 이것저것.

- 그냥 이것저것 뭐?

- 계속 물어볼 거야?

- 계속 물어보면 안 올 거예요?

- ···

- 밥은요?

- 아직.

- 다 폈으면 들어가요. 나도 아직 안 먹었어요.

- 뭐 해줄까?

- 그렇게 능글맞게 웃지마세요.

- 나는 웃는 얼굴이 더 예쁜데.

- 그건 맞네.

불만이 생겼다. 버려지지 않을까하는 불안도 함께.


143.

그 여자의 생일은 4월 6일, 4월 6일이라니 참 좋네. 날짜 말고, 어딘가 단단한 구석이 있는 순애가 말이야. 취향이 확실하다던가,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분명한 것과, 우리 집에 찾아올 때면 단단하게 뭉쳐있는 어깨가.

그걸 꾹꾹 주무르고 있으면, 너가 온종일 조약돌처럼 웅크려있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가슴 한켠이 찝찔해져 온단말이지.

- 물 한 잔 드려요?

- 너는 내 마음도 읽나봐. 가끔 깜짝 놀란다니까

- 다 알죠 전.

- 근데 왜 순애에요?

- 본명은 아닐 거 아니예요.

- 혹시 알아? 진짜 순앨지.

- 에이,

- 너는 왜 동젠데?

- 우리 할매가 지어준 이름이예요. 물론 제 이름은 동제는 아니지만요. 촌스럽죠?

- 왜 예쁜 이름인데.

- 누나 이름은 왜 순애에요?

- 그냥.


- 왜 이렇게 사람이 방어적이예요.

말에 감정이 묻었다. 말에 감정이 묻으면 의도가 틀어진다. 근데 이번엔 튿어진 마음이 맞았는데,

- 내가 방어적인 데, 너가 보태준 거 있니.

네 말엔 감정이 묻어있지 않네. 어째서 그렇니. 이런 질문에 이골이 나 있어서?

- 저한테는 조금 안 그러셔도 될 거 같은데.

순애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오싹한 느낌. 그런 느낌이 들 때면, 평소에는 숨어있 순애의 향수 속 피 냄새가 진하게 펴져 나왔다.

- 나 갈게.

- 그러세요. 다음에도 그냥 그렇게 슥 왔다가, 슥 가세요.


144.

네가 날 보고 1월 19일쯤에 보는 크리스마스 트리 보듯 할까 걱정도 했지.

이젠 나와 무관하다는듯 말이야.

마음은 뭉쳐있는 어깨를 주물러 풀듯 풀리는 게 아니었는데.


145.

너는 봄 제비 돌아오듯 다시 날아왔었는데.

날 위해서였는지, 너 자신을 위해서였는지는 잘모르겠지만.

순애가 우리 집에 올 때는, 번호 누르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순애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유의 여유있는 리듬이 있거든. 하긴 그 새벽에 비밀번호 누를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었으니까. 알 수 있었다는 말은 조금 웃긴 말인가

순애는 언제나 집에 오면, 한겨울에 노천탕에 들어온 사람처럼, 깊은 숨을 내뱉고는,

- 나왔어.

현관으로 나가보면, 어떨 때는 팔을 활짝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던가, 그럴 여력이 없었던 날에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시고, 소파에 털썩 주저 앉곤 했는데 그 날은 패턴이 조금 달랐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는 소리. 다시 찾아온 순애가 반가웠고, 뱉던 깊은 숨까지도 똑같았지만, 달랐던 건.

- 잠깐만 와봐. 이것 좀 들어줄래?

- 왜요?

- 줄 게 있거든.

현관으로 갔을 땐, 순애가 활짝 웃는 표정으로 식물을 들고 있었다.

- 이거 키워.

- 왠 식물이예요?

- 이 집엔 나 없으면 살아있는 게 없잖아. 생각해보니까 조금 짠해서.

- 식물 안 키우는데.

- 라는 이유는 사실 둘러대려고 준비한 이유고, 진짜 이유는 미안해서야.

- 어떤 게요?

- 저번에 화 낸 거. 내가 잘못했어.

- 뭘요. 제가 괜한 걸 물어봤죠.

- 식물 이름은 뭘로 할까요?

- 순애로 해.

- 말려죽여야지.

- 허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고 그러냐.

- 농담이죠.

- 밥 먹었어요?

- 아니, 아직.

- 밥 먹을까요?

- 그 말 들으려고 여기 오잖아.

- 밥 먹자는 말이요?

- 응, 되게 좋은 말이잖아. 뭐랄까, 되게 안정감 든다고 해야 되나.

- 세 번 먹을까요?

- 꺅 뭔가 야하다.

- ?


146.

- 한 번은 사랑에 대한 것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어요. 잘 안 하는 생각인데, 갑자기 떠오르더라구요.

아 그게 언제였더라. 응 맞아 그랬지. 할매가 아팠을 때 병실에서. 그 날은 유독 할매가 밤 새 뒤척거린 날이었고, 동물농장에선 아픈 몸으로 새끼를 지키는 고양이가 나왔었지. 나는 왜 그 때 사랑에 대한 생각을 했었더라. 새끼 고양이가 부러워서 그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 있었던 할매가 든든해서였었나. 혹시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나.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보게된다면, 놀라서 도망가진 않을까. 얼마 뒤엔 하연이를 만났지. 되게 좋아했었는데. 왜 헤어졌더라. 여력이 안 되서? 사랑씩이나 되는 거에, 여력이 없을 수 있나.

- 언제 그런 생각을 했어?

-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할매가 아팠었거든요. 그 때 병간호 할 때요.

- 할머님을 많이 사랑하나보네.

- 그쵸.

- 근데, 할매에 대한 사랑은 아니었구요.

- 응.

- 우리 할매가 동물 영상을 되게 좋아했거든요. 그 날도 동물 영상을 보는데, 아픈 어미 고양이가 새끼고양이를 보살피는 내용이 나오더라구요. 그걸 보고 뜬금 없이 든 생각이었죠. 나도 혹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 그래서 했어?

- 음, 비슷한 건요.

- 왜 헤어졌어?

- 여력이 안돼서 그랬나. 좀 핑계 같나요.

- 글쎄 잘 모르겠네.

침묵이 흘렀고, 그제서야 화장실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잠깐 가까이 와볼래.

- 네?

- 가까이 와보라고.

순애가 의자를 끌어 거리를 좁혔다. 손으로 내 얼굴을 포개어 입을 맞췄다.

- 왜요?

- 가여워서.

부정당하는 느낌. 내가 겪은 모든 저주 같은 게 싼 값에 팔린 느낌

- 너는?

- 그럼 당신은 안 불쌍해?


- 나도 불쌍하지.

- 근데 그렇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고.

- 안아줄까.

- 그럴래?

- 응.

- 왜?

- 가여워서

- 그러게. 우리 둘 다 참 지랄맞게 가엽다.


147.

창백하게 새 하얀 피부에, 검게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 가끔씩은 머리카락이 너무 짙은 검은색이라 피부가 더 하얘보이는 건지 피부가 너무 하얀 탓에 머리카락이 더욱 검게 느껴지는 건지 헷갈린다니까.

- 누나는 피부색이 하얀 거에요 머리카락이 까만 거에요?

-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몰라?

- 두 쪽 다려나.

- 한 번 봐줄래?

- 보고 있어요. 참 신기하네.

- 잘 한 번 봐봐. 고무줄 있니?

- 네, 마침 책상 위에 있네요.

- 자 이제부터 나는 머리를 묶을 거야. 잘 안 하는 행동이니까 지금 모습을 잘 기억해두록 해.

- 팝콘 좀 가지고 와도 돼요?

- 팝콘 먹을 시간이 없을 걸?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난 목선이 되게 예쁜 편이거든.

- 안 볼래요.

- 엥 왜?

- 음흉한 생각할 거 같아서요. 동거인으로서의 예의랄까요

- 지금 눈 가린 거야?

- 어,, 어어 다가오지 마세요. 지금 오고 있는 거 다 느껴져요.

- 이래도 안 봐? 나 좀 더 가벼워졌는데

- 절대 안 봐.

- 이래도? 어? 이래도 안 봐?

- 절대,,,절대,,,!


148.

혹시 어떤 남자가 당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지 궁금하신지.

그렇다면 순애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꼭 해보시길.

그 사람이 팝콘을 들고 와서 와그작 거린다? 선한 사람이다. 귀엽게 봐주셔라.

만약 그 남자가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기다린다? 물론 넘어가도 좋다.

혹시 잡히지 않는 걸 잡으려는 듯 양 손이 허공을 유영하는가. 일단은 넘어가도 좋다. (조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긴 하다.)

하지만 눈을 꽉 감고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작게 난 뒷문으로 당장 전력질주 해라. 아직 문은 열려있다.

그건 보통 종류의 흑심이 아닐테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이 당신을 어지간히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건 문제다.)

당신을 사람보단 신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판단은 알아서들 잘 하시길)

성난 신자들은 신앙심을 등에 업고 언제든 광기를 혈관 속으로 흘려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149.

- 혹시 너 고자야?

- 고질라요?

- 이젠 슬슬 수상할 정도야.

- 아무래도 내가 요괴가 아니라 너가 고자가 맞는 거 같아.

- 굳이 급하게 그럴 필요없잖아요.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니고.

- 아니 보통은 말이야. 타이밍이라는 게 있잖아. 나이 비슷한 성인남녀가 도시에서 만났고, 이렇게 거의 같이 산다면 생길만한 예측 가능한 일들에 대한 타이밍말이야.

- 스킨십에는 뒤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앞만 보고 달릴 거라면 지금처럼 이런 외줄 타는 듯한 상태를 좀 더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아요?

- 고자. 바보. 멍청이. 똥개. 나중에 잘 때 덮칠 거야.

- 누에고치처럼 꽁꽁 싸매고 자야겠다.

- 가위로 자를 거야. 비단 채취하듯이.

- 발가벗고 자서 당황시킬 거야. 애벌레처럼 꿈틀거려야지.

- 자를 때 조심히 잘라야겠네. 실수로 잘못 자르면 어우··· 무지 아프겠다. 그치.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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