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와 서울밤

나와 순애

by 평일

127.

순애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혹시 연락을 놓칠까 충전기를 꽂아두고 그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지. 그 땐 내가 목줄 묶인 강아지가 된듯한 나쁘지않은 기분이 들었는데.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꾹 참았지. 그건 좀 뻔한 느낌이니까.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들었다. 아무런 연락이 없길래 핸드폰을 내려놨다. 들었다. 다시 내려놨다. 한 번 더 들었을 땐,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어?

[오늘은 학교 끝나면 뒤에는 뭐 없어요]

[오늘 볼래요?]

[네 뭐 좋죠.]


128.

- 비싼 거 먹어도 돼요?

- 고작 담배 한 대로요?

- 농담이에요. 애초에 오늘 제가 살 생각이었어요.

- 비싼 거 먹어도 돼요?

- 되죠. 저 돈 많거든요.

- 됐어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 그럼 담배로 갚으세요.

- 이거 독한데 괜찮으세요?

- 좋아하죠.

- 술은 좋아해요?

- 좋아는 하는데, 잘은 못해요.

- 와, 부럽다. 가성비가 되게 좋네요.

- 가성비 좋다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네요.

- 즐겨 쓰는 표현이예요.

- 아, 나이는 혹시 어떻게 되세요?

- 몇 살이신데요?

- 저는 23살.

- 저는 25살.

- 누나시네요.

- 그렇네.

- 갑자기요?

- 놓지 말까?

- 아뇨. 편하실 대로.

- 그래.

- 혹시 저는···

- 에이

- 넵.

-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딱딱해지진 말고.

- 넹.

- 오늘은 술을 좀 마셔야겠어. 안 좋은 일 있었거든.

-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거죠.

- 그럼. 파악이 빠르네. 좋다.

- 좋아요.

- ···

- 독서클럽은 왜 안 나오셨어요.

- 해야 할 일이 많아졌거든.

- 그럼 독서클럽은 왜 나오셨어요?

- 오늘도 취조하러 나왔니.

-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되게 많거든요.

- 나한테? 왜?

- 아는 사람 닮았어요.

- 그 멘트 되게 별로다.

- 별론 거 알아요. 근데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엄청 아끼던 사람이었거든요.

- 그럼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 이젠 못 봐요.

- 그렇구나

- 그런 의미로 누나도 오늘 보고 못 보면 많이 슬플 것 같아요.

- 나는 너가 꽤 마음에 드는데.

- 그렇겠죠.

- 꽤나 확신하네.

- 많이들 그렇더라고요.

순애가 픽 하고 웃었다. 찌들어 힘 없이 웃는 웃음. 되게 그리운 웃음이었다.

- 책 좋아하거든. 많이 읽진 못해도.

- 저는 책 별로 안 좋아하는데.

- 그럼 독서클럽은 왜 온 거야?

- 말씀 드렸잖아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요.

- 그래서 뭐가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데?

- 오늘은 말고요. 오늘은 순애 만나러 왔거든요.

- 다음에 내가 너 안 만나면?

- 오늘 매력 어필을 최대한 많이 해보려고요.

- 춤부터 시작할까요? 그 다음은 복화술은 어떠세요. 별로면 공중제비? 그림자 놀이?

- 알겠으니까 앉아.

- 넹.


129.

- 혹시 취했어요? 눈을 왜 그렇게 떠요?

- 나? 안 치했는데.

- 집에 갑시다.

- 나 집 없는데.

- 그럼 방 잡아드릴 테니까, 거기서 자세요.

- 나 모르는 곳에서 잠 안 자.

- 그럼 어디서 자게요.

- 너네 집.

- 우리 집도 모르는 곳이잖아요.

- 너는 아는 사람이잖아.

- 그러세요 그럼. 전 방 잡아서 잘게요.

- 진짜 그럴 거야?

- 네, 뭐. 집에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 내가 너네 집에 있는 비싼 거 훔쳐 가면 어쩌려고. 음 예를 들어 금붙이라던가,,, 다이아몬드 반지라던가,,, 뭘 그린지도 잘 모르겠는 그림이라던가,,,

- 그러실 거에요?

- 보고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 그렇게 하세요. 그럼.


130.

- 잘 들어 가셨어요?

- 응, 그랬지

- 뭐 좀 건지셨어요?

- 응, 벽에 걸려 있던 시계랑 이것저것.

- 일단 시계는 여기 벽에 잘 걸려 있네요.

- 한 번 잘 찾아봐. 시계보다 더 치명적인 걸 가져갔을 수도 있잖아

- 청소는 왜 하고 간 거예요.

- 더러우니까. 청소 좀 하고 살아. 이 자식아.

- 우리 집 깨끗한데.

- 우리 또 볼 수 있어요?

- 나중에, 기회 되면.

- 그렇죠. 그렇겠죠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무엇을]

육하원칙이다. 아니, 아니. 이걸로 기사나 글 같은 걸 쓰고 싶다는 게 아니라.

누가 빼고 아무것도 모를 다음 약속에 대한 것에 대한 실마리를 얻고 싶었다는 거지.

- 최대한 빨리 봐요. 근사한 곳에서

-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131.

그 애가 보고 싶었다.

그 여자에게서 나던 향을 다시 맡고 싶었다.

순애가 떠난 날은 이불을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날이었는데, 이불에서 그 향이 나길래 주말 내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피 냄새, 베이비 파우더에 베이비 파우더 한 스푼 더. 철? 분? 만났을 때 물어볼 걸. 무슨 향수 쓰는지 같은 거 말고

132.

자기 권리는 자기가 찾는 것이라고, 나는 꼭 진취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방금 이불 속에서 나와 생각했다.

- 저는 자기 권리는 자기가 찾는 거라는 생각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는데요.

- 근데?

- 오래간만에 얼굴 한 번 보자는 거죠. 기회는 생기는 게 아니라 잡아채는 거라잖아요.

- ···

- 너도 정상은 아니구나?

- 그런 말 가끔 들어요. 다른 게 아니라 하루종일 스시가 먹고 싶었는데 딱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밖에 없더라고요.

- 나 오늘은 일하는데.

- 몇 시에 끝나시는데요?

- 늦게?

- 잘됐다. 오늘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술을 좀 마셔야 될 거 같거든요.

- 그래, 그럼.


- 혹시 또 취했어요? 가성비가 썩 좋진 않네요.

- 말짱한데?

라는 말을 끝으로 순애가 테이블에 고개를 박았다.

-자 이제 갑시다.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잘 예정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서 엎드려 있는 순애의 뒤에 섰을 땐, 순애의 윗옷이 조금 올라가 있었고, 그 틈 사이엔 큼지막한 흉터가 있었다. 무언가 보면 안 될 걸 본 기분이 들어 급하게 다시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땐.

- 야.

-

- 너 봤지.

아마 그게 순애의 삶의 흠져있는 부분이었겠지. 저런 반응은 꼭 자신의 치부를 들켰을 때니까.

-네.

무슨 말을 할까, 많이 화가 났을까.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그 짧은 시간에 꽤 많은 경우의 수를 두고 생각을 해 보았다. 최악은 그대로 일어나서 날 만나주지 않은 것이었고, 차악은 테이블에 있던 소주병으로 내 머리를 때리는 것, 최고의 상황은 어느 정도의 질책과 분노 정도이려나.

- 죄송해요. 보려고 봤던 건 아닌데.

- ···

- 누나.

- 저기요?

- 선생님?

- 야

역시 내 예상대로는 가주질 않는 여자라니까.


133.

순애와 함께 우리 집에 왔을 땐, 순애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고, 순애를 침대에 눕혀두고 거실로 나와 멍을 때리다가, 조금 더 멍을 때리던 와중에 문득 집이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다른 사람한테 혼나는 게 싫은 나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청소를 시작했지. 청소를 다 하고 나니, 시간은 새벽 3시쯤이었고, 나도 슬슬 졸음이 쏟아져왔던 탓에 밖으로 나가려다, 순애가 보고 싶어서 방에 들어갔을 때 순애는 여전히 새근새근 자고 있네, 뭐랄까, 되게 현실감이 없던 장면이었기 때문에 졸음이 잠시 달아났다가, 너무 편안하게 누워있는 순애의 모습에 나까지도 피곤해져버려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땐,

- 왜 나가. 좀 더 보고 가지.

- 안 잤어요?

- 재워주는데, 이 정도 팬서비스는 해 줘야지.

- 고마워요.

- 내일 봐요.

- 갈 거야?

- 네, 졸려서요.

순애가 날 바라봤다.

- 안 가면 안 돼?

- 잘 데가 없는데요. 저 쇼파에서는 못자요. 허리가 안 좋아서.

- 내 옆에 누워. 침대도 넓고 좋은 거 쓰면서 왜.

- 들어와, 그럴 줄 알고 내가 따뜻하게 데워놨어. 5월인데도 밤에는 춥다 그치.

- 그러게요.

- 어때, 따뜻하지? 안 나가길 잘 했지?

- 네, 따뜻하긴 한데, 저 이불 좀 주시면 안 돼요? 저 지금 세로 반 쪽이 너무 추운데

- 그건 안 돼. 너네 집 이불 너무 포근하거든.

- 아, 뭐 네.

- 이불 더 큰걸로 바꿔야겠다.

- 뭐야? 지금 같이 살자는 거야?

- 그건 아니고요.

순애가 깔깔 웃어댔다. 나는 그때 순애처럼 웃어줄 여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 뭔데?

-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면 안 돼요?

- 들어주시면, 음 들어주면, 저도 들어드릴게요.

순애가 다시 눈을 감더니, 편안한듯 기분 좋은 신음을 내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어갔다.

- 내일 얘기 하자. 지금은 너무 편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거든.


134.

- 오 뭐야? 오늘은 깨끗하네? 치울 게 없는데?

- 새벽에 청소하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 청소 했어?

- 혼나기 싫어서 했죠.

- 잘했네.

- 밥 먹을 거죠.

- 해주는 거야?

- 어떤 거 좋아하세요?

- 송아지 스테이크

- 김치찌개로 가죠.

- 왜 김치찌개야?

- 할 줄 아는 게 김치찌개 밖에 없어서요.

- 뭐야, 요리 잘 하는 것처럼 얘기 해놓고선.

- 잘 못해요.

- 나와봐 난 잘 해. 냉장고 연다?

- 별 거 없는데.

- 뭐야, 사람 사는 집 맞아? 진짜 있는 게 없네.

- 평소에는 시켜 먹어요.

- 매일 시켜먹으면 지겹지 않아?

- 지겹죠.

- 있어봐, 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볼게.

그땐 누나가 없는 재료로 뭔가를 만들어 줬었지. 사실 맛은 정말 없었는데.

- 그래서 어때요. 의향 있으세요?

- 응.

- 그럼 자주 오세요.

- 이불 큰 걸로 바꿔놔.

- 같이 살자는 거예요?

- 내키면

- 저는 되게 내키는데요.

- 아니, 내가.

- 제 집인데도요?

- _^~^_


135.

요즘 들어 부쩍 해야 할 게 많아졌다.

이불을 감고 자는 습관이 있는 순애를 위해서 커다랗고 까실까실한 여름 이불을 사는 것.

요리를 배우는 것. 이건 날 위해서였고.

집에 좋은 향기가 나는 디퓨져 몇 개와 양치컵을 한 개 더 구매해두는 것. 이건 우릴 위해서.

저번 주에 산 심리학 책 두 권을 읽는 것.

사람에 관해선 많은 면을 접해봤다고 자부했던 내가 그 여자에 대해선 파악 되는 부분이 전혀 없길래 도움이 될까 해서 구매했던 책이었고,

그저께 산 괴물 백과사전 한 권을 짬짬히 읽는 것.

두 권을 모두 다 읽어갈 시점에서도 아무것도 짐작가는 부분이 없었던 탓에 혹시 순애는 괴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구매했던. 어쩌면 순애는 백과사전에 실려있는 '로쿠로쿠비'가 아닐까.

밤이 되면 목이 뱀처럼 늘어나는 이 괴물은 사람을 홀려 물건을 훔치는 습성이 있단다.

가끔 뱀파이어처럼 인간의 피를 빨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하길래, 목도리라도 사둘까 하다 너무 더울 것같아서 일단은 보류중에 물어봤던 이 질문.

- 누나 혹시 선지같은 거 먹어요?

- 엄청 좋아하지. 왜?

- 혹시 되게 좋아하세요?

- 되게 좋아하지요?

- 왜?

- 아뇨, 그냥.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랬구나.

- ? 무슨 말이야.

- 그런 게 있어요.

-

아무래도 내일 해야할 일이 한 가지 더 생긴 것같다.


136.

-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신 거에요?

- 음, 아주 오래전부터.

- 저는 스무 살 때부터 피웠는데.

- 나도 스무 살 땡 하고 피웠는데?

- 어, 그럼 막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네요?

- 내가 몇 살일줄 알고.

- 혹시···

- 요괴 같은 거에요?

- 그 막 목 늘어나는.

- ?

- 반응 보니까 맞네. 어쩐지.

-

- 봐봐 부정도 안 하네.

- 아닌데.

- 거짓말. 진짜 아니었으면 듣자마자 아니라고 했어야지.

- 사실 맞아.

- 그럴 줄 알았다.

- 너 아까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다.

- 무슨 의미가 있어요.

- 너 이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요괴 본 적 있어?

- 없죠. 그러니까 요괴라는 거죠. 나 홀려서 우리 집에 있는 비싼 거 훔쳐가고 피도 빨아 먹고 그럴라고 이러는 거죠. 진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니까.

- 사람이 아니지. 요괴라며.

- 믿을 요괴 하나 없다니까.

- 그래서 이젠 나 안 좋아하는 거야? 고작 그런 이유로? 너 주려고 선물도 생각해 놨는데.

- 뭔데요?

- 지금 줄까?

- 지금 있어요?

- 응, 있지. 가까이 와 볼래? 목도리도 좀 풀고.

- 왜요.

- 좀 붙어봐.

- 왜요.

- 목 좀 대 봐.

- 왜요.

- 눈 좀 감아봐.

- 왜요.


137.

- 향 좋지. 너도 이제 나랑 같은 향 난다.

- 향수 뿌리신 거에요?

- 응. 내가 제일 아끼는 향수야.

- 향 좋다.

- 영역표시 한 거야. 동물들이 하는 것처럼.

- 저한테요?

- 응, 너가 이 집 주인이니까. 그것만큼 확실한 영역표시가 어디있겠어.

- 우와 되게 큰 선물이다. 어디서 이런 걸 준비해오셨어요.

- 신경 좀 썼지.

- 되게 신경 쓰셨네.

- 근데 어떡해. 나는 뭐? 뭐라고 했었지. 요괴? 뭐 그런 피 빨아먹는 괴물인데

- 에이 뭐 좀 어때요. 앞으론 좀 더 건강하게 먹으려구요. 빨리는 쪽이나 빠는 쪽이나 그게 더 좋지않겠어요?

- 그래. 그게 좋겠다. 팔 좀 줘 볼래?

- 아 왜 깨물어요. 하루종일 자국 남겠네.

- 아까 반말했잖아.

- 이것도 일종의 영역표시 같은 거에요?

- 아니 이건 그냥 아프라고.


138.

- 아파요?

- 응.

- 손 좀 치워보세요.

- 와, 잠깐만 잠깐만. 너무 아픈데.

- 엄살은.

- 손가락을 이렇게 가로로 베여 오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어쩌다가 이런 거에요?

- 연필 깎다가.

- 조심 좀 하시지.

- 그러게 조심 좀 할 걸.

- 이불 바꿨어요. 크고 까실한 걸로.

- 좋은 소식이다.

- 저녁은 먹었어요?

- 아니 아직 안 먹었어.

- 시간이 10신데 왜 아직 안 드셨어요.

- 오늘 무지하게 바빴거든

- 우리 암마도 항상 무지하게 바빴는데.

- 어머님이? 왜?

- 하는 일이 바빴기도 하구요. 주변에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 모르는 사랑도 많았고요.

- ···

- "쓰다"라는 말 있잖아요. 약이 쓰다 말고, 뭔가를 사용하다 할 때 쓰다요.

- 그 말이 뒤에 붙으려면 대상이 반드시 유한해야 하더라구요. 시간이나 돈 처럼요.

- 마음도 그런가보죠. 우리 암마는 나한테 쓸 수 있는 마음이랑 시간을 제가 어렸을 때 다 써버렸나봐요.

- 들어주기로 했던 얘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데, 어때요. 다음 번에도 들어주실래요.

- 응, 그럴게.

- 이제 슬슬 들어갈까요. 이불 구경 하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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