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극<낭랑긔생>(2019)
더 무모하고 불온하게 비튼, 발칙한 여성 서사를 기대해본다
지난해 겨울 떠난 스페인 여행 중, 카탈루냐 음악당에서는 오페라 ‘카르멘’을, 그라나다의 작은 선술집에서는 플라멩코 공연을 봤다. 공연장은 스페인 전통무용을 보기 위해 모여든 세계 각국의 여행자로 가득했다. 문득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은 관광자원으로 충분히 활용되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고, 서울 중심에 위치한 정동극장이 떠올랐다.
1995년 개관 이래 ‘전통예술무대’(2000) ‘미소’(2008) 등 상설공연을 기획해온 정동극장은 한국을 찾은 관광객에게 전통예술의 볼거리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서 정동극장을 찾은 내국인에게는, 이방인의 시선에서 새롭고 이색적으로 느껴질 법한 요소들이 빛을 바랬다. 고전에 기반을 둔 스토리 라인은 때로 진부하게 다가왔고, 상업성까지 고려한 전통예술적인 요소는 원본과 비교해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듯, 정동극장은 2017년 ‘창작ing’이라는 제작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도전적인 창작진을 발굴해 전통예술의 '재현'을 넘어 '계승, 발전'하겠다는 의지였다. 음악극 ‘낭랑긔생’은 바로 그 2019년 ‘창작ing’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1920년대를 살았던 실존인물 강향란(1900~?)을 모티브로 삼고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대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 당시의 신문 기사는 강향란을 ‘머리깍고 남복한 녀학생’으로 묘사했다. 사연인즉, 머리 깎은 여자는 다닐 수 없다며 배화학교에서 퇴학 처분된 강향란이 남장을 하고 강습소에 통학한 것이었다. 강향란은 자신의 신체를 매만지는 매우 개인적인 행위지만, 동시에 반사회적인 의사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던 ‘단발’을 하여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거듭난다. 이는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소재다. ‘탈코르셋’을 ‘선언’한 한국 여성의 현재 상황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낭랑긔생’은 과거의 인물이 지닌 공감대 외에도, 전통음악을 재료로 한 노래와 한국춤에서 따온 안무로 전통과 현재를 잇는다. 작곡을 맡은 음악감독 류찬은 1920년대가 한국이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던 시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사운드트랙을 완성했다. ‘퓨전국악’이라고 불릴 법하게 국악을 베이스로 한 음악에서 동요·디즈니 음악· 북한 가요·찬송가·왈츠 등 다양한 분위기가 연상됐다. 기생들의 단체 안무는 율동처럼 단순했는 데, 한 손을 올린 채 제자리를 도는 원무가 눈에 띄었다.
“우리 여자들은 현모양처가 되기보다는 불온하더라도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강향란의 외침은 100분 공연 중 마지막 15분을 남겨놓고서야 시작된다. 그전까지는 여성의 저항 운동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한 길고 긴 설명이다. 향란이 아버지의 노름빚 때문에 기방에 팔려가서, 기생은 물건 취급받는 시대라서, 여성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 등등. 사회적 억압에 맞선 여성이 어떻게 무모해지는가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은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전통과 관습을 더 무모하고 불온하게 비튼, 발칙한 여성 서사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