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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23. 2024

9살 아이의 반장 불출마 선언

반장 선거에 나가보면 어때?

  알림장 어플에 내일 학급 임원 선거가 있다는 공지가 떴다. 1학년 때는 반장이 없지만 2학년부터는 반장을 뽑는다. 우리 아이가 첫 반장이 되면 어떨까. 무엇이든 '처음'이 주는 설렘과 의미가 있기에 울이가 반장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교하면 아이 생각이 어떤지 슬쩍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절대 아이에게 부담은 주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교문을 나선 아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엄마, 내일 반장 선거 있대.

  아, 그래? (몰랐던 척,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다.)

  근데 나는 안 나갈 거야.


  선거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공약을 만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의 공약이 뭐 별 건가.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을 잘 도와주겠다고 하면 된다고, 어려운 게 아니라고 아이를 슬며시 설득했다. (한번 해보지 않을래,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귀찮아.     


  한 번 더 아이를 설득해 보자는 마음과 괜한 부담을 주지 말자는 마음이 부딪쳤다. 아쉬웠지만 여기까지만 하자. 반장을 했으면 하는 건 내 욕심이다.      


  그래,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중에 하고 싶을 때 하면 돼.     

  그러면서도 혹시나 싶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반장 하면 되게 좋아. 아이는 심드렁했다.    

           




  선거가 있던 날 오후에 담임선생님과 상담이 잡혀 있었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물으셨다.    

  울이는 반장감인데, 왜 선거에 안 나왔어요?     

  반장감이라는 말에 으쓱해지고, 역시나 선거에 안 나갔다는 말에 아쉬워졌다. 집에서 전날 울이와 이야기했던 것들을 선생님께 전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울이가 어린이집에 다녔을 때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울이는 관찰하는 시간이 길다. 주변을 한참 살펴보고 생각하고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제야 움직였다. 그리고 언제 가만히 있었냐는 듯 신나게 놀았다. 아마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반장이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고 공약을 만드는 것도 처음이니 낯설었을 거다. 괜히 선거에 나갔다가 잘 해내지 못할까 봐 걱정도 했을 것 같다. 울이는 어떤 것인지 잘 알게 된 후 자신감이 생기고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움직이는 아이였다.     


  그날 오후, 울이에게 선거를 해 보니 어땠냐고 물었다.

  엄마, 반장에 떨어지면 부반장 선거에 또 나가도 된대. 근데 내가 뽑은 아이는 반장이랑 부반장 둘 다 떨어졌어. 반장이 된 혜윤이는 종이 공약을 적어왔어. 봐봐, 이 만한 종이에 적어왔어.      


  아이가 공책 한 페이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엄마가 좀 더 아이를 밀어주고 챙겨줬어야 하는 건가. 아쉬움이 생겼다. 아니다. 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하자고 하면 울이는 짜증을 내며 싫다고 거부했을 거다. 엄마의 욕심을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쩌면 눈치가 빠른 울이는 엄마의 마음을 벌써 알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아이에게 여러 번 권유하면서 부담을 주지 않았으니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학교에서 충분히 느끼고 경험해 본 후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줘도 괜찮다. 앞으로도 계속 반장 선거에 나가기 싫어해도 괜찮다. 한 번도 반장을 해 보지 못했던 엄마가 아이를 통해 대신 이루고 싶은 거니까. 그리고 반장을 안 해 봐도 이렇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어쨌든, 울이의 첫 선거는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집에 와서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이것저것 그리고 집에 있는 인형들이 선거에 나간다며 공약을 써넣었다. 색종이를 스무 장 넘게 접어 놓고, 한 장씩 펴고 이름을 부르며 인형들의 개표 결과 방송을 했다. 어제도 오늘도 동생과 한참 선거 놀이를 했다. 책에서만 보던 선거를 직접 해 보고 느꼈으니 제법 배운 게 많은가 보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가 못해 봐서 아쉬운 것들을 아이가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아이가 피아노를 배웠으면 좋겠고, 수영도 시작했으면 좋겠고, 태권도 학원에도 다녔으면 좋겠다. 아이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피아노, 수영, 태권도는 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다. 내 욕심이 슬그머니 아이에게 스며들 때, 정신을 번뜩 차려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하고, 아이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자고 다시 마음먹어본다. 그래도 사실 아쉽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가 지금처럼 학교에 즐겁게 가고 친구랑 사이좋게 보내고 오는 것만 해도 대단하고 감사한 거다. 아이가 잘하고 있다고 많이 격려하고 응원해 주자고 다짐한다. 슬며시 내 욕심이 올라올 때마다 엄마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래도 괜찮다. 아이와 나 자신을 생각하며 제자리를 찾으면 된다. 오늘도 아이 덕분에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밤이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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