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다가

by 여름

아무 날도 아니었던 평범한 일요일. 평소처럼, 주방으로 가서 라디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담은 빨간색 머그컵을 넣고, 1분 30초 버튼을 눌렀다. 삐삐삐. 시간이 다 됐다는 알림을 듣고 컵을 꺼낸 후, 커피 머신에 디카페인 포르타도 캡슐을 넣고 따뜻하게 데워진 컵에 커피를 내린다.


손 편지 잘 읽고 있어요. 그럼요, 그럼요. 제가 손 편지를 좋아하거든요. 오늘 많이 도착해서 광고 나오는 동안에도 잘 읽어볼게요.


아침 9시, MBC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정지영 씨의 다정하고 물기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몇 달 전 일요일은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 마지막 방송일이었다. 매일 꾸준히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전에 문득 생각이 날 때면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했다. 게스트와 까르르 웃고, 귀여운 사연에 미소를 머금게 하고, 담담한 듯 따스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았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더 화끈한 노래를 듣는 거예요.

어느 날 알게 된 마지막 방송일 소식에 아쉬움이 가득해졌다. 오랜 시간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그녀의 마음은 더 일렁였을 것이다. 부러 목소리 톤을 높여 밝게 말하려 노력하는 디제이의 목소리가 왠지 낯설었다.


누군가 떠난다는 것은 참 아쉽다. 그녀의 라디오 방송은 나에게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를 채우기만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십여 년 전 남자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렸고, 다섯 살 울이와 세 살 꿍이와 함께 뚜뚜루 송을 연습했고, 혼자 있을 때면 빈 마음을 다정한 목소리와 노래로 채우던 시간들이었다.


한 번씩 저희 생각해 주셔야 해요.

매일매일 생각할 거예요.

디제이와 청취자의 대화에 아련하고 아득해졌다. 성실한 애청자도 아니었으면서 마음 한 조각을 잘라낸 듯 허전하고 그립다. 한동안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것 같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건 없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할 테다. 빈자리는 또 누군가가 채워줄 테고,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겠지. 그러면서도, 내 자리 역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애틋하고 소중하게 남길 바라게 된다. 떠날 때 빈자리를 그리워할 수 있도록,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내가 해야 할 몫인 것 같다.



이미지: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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