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센터 수업을 듣는 날이었다. 아이 옷을 갈아입히고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 커튼 옆에서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가 많이 난 듯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귀가 쫑긋해졌다. 아이는 엄마의 말에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발 넣어. 따라와."
단호하고 차가웠다. 아이를 교실로 들여보낸 엄마는 다른 엄마에게 화난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제 아빠 얼굴을 세게 때려서 당황스러웠다는 것. 아빠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함부로 행동하는 것 같고, 그게 괘씸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싸대기라니, 죽을 줄 알라니, 심한 것 아닌가. 아이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쓰지 않는 나는, 저 사람보다는 좋은 엄마가 아닐까 생각도 했다. 어이없게도.
가족들과 쇼핑을 끝내고 백화점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적이 있다. 심심하고 힘들어서인지 징징거리고 짜증을 내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밖에서 밥을 먹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큰 소리가 났다. 어떤 엄마가 테이블을 손바닥을 탁 치면서 아이에게 "야, 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듯, 아이를 제대로 혼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보고 있고, 아빠는 엄마의 표정만 조심스레 살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소리를 저렇게 지르나, 엄마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무섭게 눈을 뜨고 아이를 윽박지르던 나를 떠올리지 못하고.
그러다 문득 나와 저 엄마들이 다를 게 뭘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밖에서는 보는 눈이 있으니 아이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말하려고 애쓰고, 화가 부글거려도 꾹꾹 참아냈다. 집에서는 달랐다. 사소한 것에 불같이 화를 냈다. 책을 보고 안 꽂아놨다고, 밥을 먹다가 돌아다닌다고, 계속 코를 후비거나 손가락을 빤다고, 엄마 말에 대답을 안 한다고, 대체 몇 번 말해야 들을 거냐고 분노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았다면, 아이에게 부드럽게 말해도 들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냐고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을 터였다. 심하다고 여겼던 엄마들과 다른 게 있을까. 나는 그 엄마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그저 따스한 엄마일 줄 알았다.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품에 꼭 안아주는 상상을 했다. 클래식을 듣고 책을 읽으며 태교를 하고, 아이를 낳으면 애지중지하며 귀하게 키우고,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엄마가 될 줄 알았다. 아이 엄마가 되어서도 세련되고 예쁘게 하고 다닐 거라고도 생각했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입덧과 빈혈로 거의 누워 있었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자고 먹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짜증 나고 피곤했다. 긴 머리카락도 거추장스러워 짧은 단발로 뎅강 잘라버렸다. 화장이 웬 말인가. 로션만 쓱 바르고 나가도 다행인, 평소 생각했던 아줌마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일기장에는 아이에게 또 화를 냈다, 다정한 엄마가 되자는 다짐이 반복되고 있었다. 모든 게 쉽지 않았다.
매일 출근시간보다 늦게 출근하던 직장 선배는 유치원생 엄마였고, 바쁘고 조급해 보였다. 매일 저렇게 뛰어서 올 바에는 조금 더 일찍 준비해서 나오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건 선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워킹맘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가 출근하기 위해서 꽤 이른 시간부터 준비를 한다는 것. 엄마의 출근 준비가 끝나도, 졸린 아이를 깨워서 먹이고 입히고 달래서 유치원에 보내는 준비가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시간에 쫓겨 발을 동동 구르고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그 선배의 입장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최승호, '북어' 중
직접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기 전에는 모른다. 설핏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어, 그러면 안 되지. 혀를 끌끌 차서는 안 될 일이다. 비난하기 전에 그 사람의 입장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손가락질하고 못마땅하게 여기기 전에, 내 모습 먼저 돌이켜 볼 일이다. '북어'가 되어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