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달력을 본다. 11월에 담은 그림은 회색 파스텔빛 바다. 아늑하고 편안한 바다 노을 밑으로 숫자들이 요일별로 줄을 서 있다. 다이어리에는 남은 올해 계획이 빼곡하고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금요일 오후에는 노란색 형관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고, 그 위로 강연 계획이 줄지어 적혀 있다. 금요일 오후에만 일정을 잡은 것은 가족과의 함께 보내는 시간을 최우선으로 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스르륵 넘겨 본다. 내년 2월에는 미국 메릴랜드에서 영어 강연회가 계획되어 있다. 영어회화 초보 책을 읽고 공부하던 때가 떠오른다. 불과 5년 전인데도 그때가 아득하게 느껴져 슬며시 웃음이 난다. 미국에 가는 김에 가족들과 한 달 미국 여행을 하려고 한다. 남편은 마이클 조던의 도시 시카고를 간다며 벌써부터 설레어 한다. 아이들도 디즈니랜드에 갈 생각에 들떠 2월이 오기만 기다리며 열심히 영어공부를 한다. 조용하고 한적한 호숫가 마을도 찾아본다. 나를 위한 코스. 시간을 모르는 사람처럼 고즈넉한 마을에서 충분히 걷고 먹고 쉬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리라.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마음이 한 없이 평화롭고 편안하다. 아등바등 쫓기듯 살았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그때를 떠올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브런치작가가 된 이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인생의 궤도가 달라졌다. 겨우겨우 버텨내던 삶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 돌덩이를 끄는 것 같았다. 무겁고 반복되는 현실에 지쳐가던 5년 전의 나는, 글을 쓰면서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바뀌었다. 엄마가 가볍고 활기차게 변하자, 가족들도 함께했다. 4년 전부터 남편도 글을 쓰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5권이나 책을 낸 인기 작가가 되었고, 13살 까칠이와 11살 순둥이도 책을 2권씩이나 냈다. 까칠이가 낸 <매일 저녁, 엄마 아빠와 함께 글을 씁니다>가 인기를 끌자, 순둥이도 <슬기로운 초등 2학년 생활>과 <슬기로운 초등 3학년 생활>을 연달아 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쓴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자, 보석을 발견한 듯 품에 소중히 안으며 뿌듯해했다.
무엇보다 나와 아이들의 관계가 아주 편안해졌다. 엄마가 다정하고 친절하게 변하자 아이들도 부드러워졌다. 온가족이 읽고 글을 쓰고 소통하는 덕분인지 사춘기를 걱정하지 않는다. 엄마에게 사소한 것도 털어놓고, 이야기 하길 잘했다며 미소짓는 딸을 본다. 신뢰받고 존경 받는 엄마, 아이들의 롤모델인 엄마가 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뜨겁게 꽉차 오른다.
미니멀을 추구하지만, 일이 바빠져 집안일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전전긍긍하고 애달아 하는 대신 필요한 것은 사기로 했다. 더 넓은 평수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식세기와 로봇청소기, 스타일러까지 모두 들인 덕분에 편해졌다. 넓고 탁 트인 거실은 우리 가족의 공동작업실이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기다란 책상에서 노트북과 공책을 펴놓고 각자 읽고 쓴다. 이 순간이면 넓은 호숫가에 앉아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평화롭고 편안한 지금이 참 좋다.
오늘은 출근하지 않는다. 연차를 내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광화문 교보타워 대산홀에서 '가족 글쓰기,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강연이 예정되어 있다. 300명을 신청자를 받았는데 10만명이 넘게 신청하는 바람에 다음 달에도 강연을 하기로 했다. 남편과 아이들도 잠깐 무대에 올라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까칠이는 잘할 수 있다며 당당하게 얘기하면서도 내심 떨리는지 순둥이 앞에서 할 말을 여러 번 연습해 본다. 남편은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귀여운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내일 오후 3시에는 슬초브런치프로젝트 2기 가족 동반 모임이 있다. 첫 모임 때처럼 드레스 코드는 파란색. 우리의 파란색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작년 모임 이후, 1년 만이다.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 출판사 대표, 강연가 등 여러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며 좋은 소식들이 들려온다. 각자 여러 곳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활동하는 동기들이 자랑스럽다.
지난 5년, 글쓰기를 하는 동안, 두텁고 답답했던 회색빛이 어느새 편안하고 생기있는 색으로 바뀌어 나를 깨워주었다. 내 안에 있던 보석이 반짝일 수 있도록 꺼내어준 글쓰기에 감사하다. 칙칙하고 어두웠던 시간 또한, 나의 일부였다. 힘들었던 그 시간들에 햇볕을 비추고 팡팡 두드려서 뽀송해지도록 하는 일은 나에게 달렸다. 그리고 아주 잘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