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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13. 2023

드래곤 엄마

아이들이 식판을 엎은 날

  별 것 아닌 것에 화가 치솟고 이성을 놓는 순간이 있다. 한 번씩. 아주 자주.


  ‘괜찮아. 실수로 엎을 수도 있지. 엄마가 닦으면 돼. 너희도 도와줄래?’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반찬과 국물이 튄 식탁 주변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쓱쓱 닦아내고, 괜찮다는 듯 미소 짓는 엄마.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우아한 엄마가 되기는 이미 글렀다. 머리가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동안, 저 아래 복근에서부터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가끔 내 소리에 놀라기도 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화났다는 것을 알고 그저 눈치만 보고 있다. 이럴 때 섣불리 말했다가는 엄마의 화를 북돋울 뿐이라는 걸 아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저녁 식사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얘들아, 밥 먹자.”라고 말한 지 5번 만에 아이들이 식탁에 앉았고, 순둥이가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한 표정으로 “에이,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하나도 없잖아.”라고 말하는 것도 괜찮았다. 까칠이와 순둥이 밥을 먹는 내내 놀이를 하는 것도 이해하려 애썼다. 놀이가 중심이고, 밥은  사이사이 잠깐씩 곁들이는 것 같았지만. 그러다 순둥이가 비스듬히 앉아 놀다가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것까지도 뭐, 참을 수 있다.

  “떨어뜨릴 수 있어, 이제 집중해서 밥 먹자.”

  숟가락을 바꾼 지 3분도 되지 않았을 거다. 또 숟가락 손잡이를 국물에 퐁당 빠뜨렸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새 숟가락을 두 번째 가져다주며, '밥'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제 장난 그만하고, 밥 먹자.”

  감정은 별 것 아닌 것에서 툭 솟아오르더니 덩치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피곤하고 귀찮다. 빨리 설거지를 끝내고 쉬고 싶은데, 아이들이 밥을 먹으면서 자꾸 장난을 친다. 저녁 시간이 길어진다. 잔소리를 그만하고 싶어서 먼저 밥을 먹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우당탕탕. 큭큭. 어떡해.

  아이들의 수상한 웃음소리와 소곤거림. 무슨 일일까. 서둘러 주방으로 갔다. 식탁 아래에는 식판 2개가 엎어져 있고, 거기에 담겨 있던 반찬과 국물도 존재감을 뽐내며 바닥에 찬란하게 펼쳐져 있다.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희들, 엄마가 앉아서 밥 먹으랬지. 왜 자꾸 장난을 쳐!”

  어제 읽은 육아서에서는 화가 날 때는 말을 멈추라고 했다. ‘그래, 화가 날 때는 말을 안 해야지. 감정이 가라앉으면 이야기해야지.’ 하고 결심했던 나는 이미 없었다. 활화산이 불을 뿜듯 아이들에게 고함을 질렀고, 신기하게도 말을 하면 할수록 더 화가 났다. 결국 하면 안 될 말까지 나와 버렸다.

  “너희, 자꾸 엄마 힘들게 할 거야!”

  어떤 육아서에서는 아이들 때문에 엄마가 힘들다는 말을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결국 무너졌다. 화에 휩싸이니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아이들이 식판을 엎었다


  “너희가 다 정리해!”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컴컴한 방에 혼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서서히 나아졌다. 아이들이 바닥을 닦으며 이야기하는 것도 들렸다.

  “언니, 우리 괜히 장난쳤다. 그치?”

  “이거 언제 다 닦지?”

  “휴지로 반찬을 모을까?”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그랬어. 우리 이거 다 닦고 엄마한테 사과하자.”

  까칠이가 오늘 새로운 속담을 배웠는지 동생에게 써먹는다. 언니는 순둥이 사이좋게 바닥을 정리하는 듯했다. 장난을 멈추고 아이들이 열심히 닦는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자 방에 있으니, 아이가 진지하게 말한 속담마저도 웃음이 났다.


  “수고했어. 이제 엄마가 정리할게.”

  아이들은 바로 양치를 하러 갔다. 평소에는 열 번 넘게 불러야 겨우 하는데, 오늘은 엄마 눈치를 보느라 스스로 척척이다. 엄마 또 화 내기 전에 얼른 양치하자, 소곤소곤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겨우 가라앉았던 화는 사라졌던 게 아니었다. 식탁 위에 쌓인 휴지 뭉치와 바닥과 의자 곳곳에 튄 국물 자국, 주방에 진동하는 어묵국 냄새에 짜증이 다시 밀려왔다. 몇 번이고 물걸레질을 해도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괜히 장난을 해서 이렇게 나를 귀찮게 만드는구나. 별 것 아닌 것에 결국 또 한 번 폭발하고 말았다.


아이들이 정리한 후


  “너희 밥 먹다 또 일어나면 엄마가 밥 다 치울 거야!”

  아이들의 시무룩한 대답 소리. 그 모습을 보니 소리 지른 게 미안해진다. 바닥을 다 정리하고 나니 화는 어느새 다 사라져 버렸다. 눈치 보는 아이들이 안쓰러워졌다. 사과는 빠르게 해야지. 화를 잘 내는 대신 사과도 잘하는 게 특기다.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괜찮아요. 저희가 죄송해요.”

  아이들을 안아주며 빙그레 웃었다.

  “아까 엄마가 화낼 때 무서웠지?”

  “응, 엄마 입에서 불이 나오는 줄 알았어.”

  순둥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얼마나 무섭고 불안했을까. 결국 오늘도 버럭 하는 엄마가 돼버렸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괜찮았는데, 다정한 엄마가 되기는 어렵고도 어렵다. 매일 밤, 매일 아침, 나는 다짐다. 다정한 엄마가 되자고,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되자고. 사소한 것에 맥없이 꺼져버리고 말지만, 놓을 수는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비루하고 못난 사람인지를 깨닫고는 한다. 이리도 별 것 아닌 작은 일에 화를 터뜨리다니. 조금만 참았으면 웃으며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부족한 엄마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까칠이와 순둥이에게 엄마가 다정하고 온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또 후회하고 자책하더라도, 더 많이 웃어주고 안아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얘들아, 이제 밥은 앉아서 먹을 거지?"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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