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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25. 2023

김치 찢어주는 남자

떠나기 전, 그와의 설레는 만찬

  "여보, 좀 강해진 것 같아."

  "왜?"

  "발령나서 계속 우울해할 줄 알았거든. 생각보다 괜찮아서 놀랐어."

  그러게, 나도 놀라는 중이다. 생각보다 담담해서.

  결혼 후 처음 발령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울 만큼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계속 나와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제일 힘들었던 건, 일요일 오후에 남편이 버스를 타러 떠 때였다. 혼자 남겨진다는 생각에 허전함과 쓸쓸함이 온몸에 들어찼다. 그를 배웅하는 동안 손을 흔들면서 내내 울었다. 남편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이번에도 한동안 우울하고 슬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담담해서 남편이 놀라는 중이었다.




  남편이 반차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소문난 맛집을 알아왔다며 30분 거리에 있는 식당으로 가 보자고 했다. 둘이서 오랜만에 밥을 먹으러 가는 길, 묘한 설렘이 일었다.

  "우리, 꼭 결혼 전에 데이트 하는 것 같아."

  식당은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앉을 데가 없어 10분 동안 기다렸다. 이곳의 주 메뉴는 돼지 두루치기. 자리에 앉으니 밑반찬이 나오고 곧이어 두루치기가 자태를 드러냈다. 얼마나 맛이 있길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걸까. 배도 고팠겠다,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음식을 먹어치웠다.


두루치기 2인분, 둘만의 데이트


  상추를 손바닥에 놓은 뒤 양념이 잘 배인 고기를 올렸다. 여기에 김치를 얹으려는데, 남편이 젓가락을 양손으로 들고 잘게 찢어준다.

  "집에서 먹을 때 작게 잘라 먹잖아. 이 정도 크기 괜찮아?"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을 그의 자상함이 오늘따라 더 크게 다가온다. 깻잎 김치를 먹을 때면 깻잎이 잘 떨어지도록 무심하게 잡아주고, 생선을 먹을 때는 살을 발라 내 밥 위에 먼저 얹어준다. 기억나지도 않을 사소한 일로 투닥인 후 어색한 날이면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맥주와 샤인머스켓 요플레를 사오기도 한다. 아이들과 실랑이 후 속상하다며 하소연하는 날에는 스트레스를 풀라며 부드러운 거품이 가득한 돌체라떼를 사오는 센스도 발휘하는 그다.


  실컷 밥을 먹고 나서 자연스레 다음 목적지를 검색했다.

  "뷰가 좋은 카페면 좋겠는데."

  네이버 지도를 검색하다 후기가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전망도 좋고 커피도 맛있고, 무엇보다 와플이 훌륭하다는 곳. 디저트 사진을 보니 점심을 먹은 것도 잊고 다시 식욕이 돋기 시작했다.


디저트는 식사처럼, 전망 좋은 카페에서


  8년차 부부의 대화 주제는 연애 때와 많이 달라졌다. 우리는 조금씩 변했지만 여전히 비슷하기도 하다. 첫 데이트 때 코코아를 마시던 31살의 남편은 이제 마흔이 넘었다. 그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서 오늘도 카페모카를 주문했다. 나는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메리카노. 잘 구워진 따스한 녹차 와플과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이 순간만큼은 세상 어떤 것도 부럽지 않다. 아이 하교 전까지 허락된 시간은 2시간. 우리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시간에 카페에 놀러다니면 좋겠다. 그러려면 돈이 아주 많아야겠지. 평일에는 관광지에 사람이 별로 없구나. 돈 많고 시간도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마냥 부러운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웃었다. 이야기가 끊긴 시간마저 편안한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참 좋은 시간이다.




  오후에는 부모님께 발령 소식을 전했다. 아직 내 마음이 추스러지지 않았을 때는 소식을 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명 듣자마자 "아이고, 힘들어서 어쩐대. 왜 또 발령이 났대야." 도리어 하소연을 하실 게 뻔했다. 진짜 위로가 필요한 건 나인데. 괜찮은 척을 할 자신이 없어서 바로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오늘은 마음이 편안했다.

  "애기 아빠, 순천으로 발령났어요."

  부모님께 전화가 왔다. 웃으며 발령소식을 전했다. 괜찮아요. 해외에 가는 것보다는 순천이 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괜찮을 것 같다. 이 시간들이 우리 가족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아직 주말부부가 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지만, 잘해낼 수 있다고 다짐해 본다. 우리에게 또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


함께 갔던 카페에서. 좋은 일아 생겨라,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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