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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08. 2023

위기에 대처하는  가벼운 태세전환의 기술

새로운 무기의 발견

  갑자기 집이 울렁울렁 흔들렸다. 집안 전체가 파도를 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기도 전에, 아이들 방에서 "삐이삐이" 하는 요란한 알림음이 들렸다. 고요한 새벽, 재난 소식 알림음은 침대 밑의 작은 먼지까지도 다 흔들어 버리겠다는 듯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아이들 깨면 안 되는데.' 다급히 방으로 가서 휴대폰 알림을 껐다. 다행히 아이들은 푹 잠이 든 탓에 진동과 소리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아주 잘 자고 있었다.

  하필 새벽에 일어나 거실에 앉아 있을 때, 지진이 왔다. 온몸으로 진동을 마주했다.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무서웠지만, 소란한 알림음에 더 놀랐다. 예상치 못한 일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진동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잠에서 깨고 울고 그걸 달래느라 애쓸 것에 더 진땀이 난 것 같기도 하다.


  집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다행이다. 남편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이런 순간에 남편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새벽에 깨자마자 바로 연락한 것을 생각하면 고맙기도 했다. 처음에는 진정이 되지 않고 조마조마했다. 몇 년 전 느꼈던 지진이 떠올라 더 두려웠던 것 같다.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글감!'

  순간 머릿속에 생각이 하나 번뜩였다. 이것도 쓸 수 있겠구나. 방금 전 느꼈던 감정을 찬찬히 되짚어보고, 어떻게 글로 완성할 수 있을까 그려보는 순간, 어느새 불안했던 마음이 신기하게도 어이없게도 아주 쉽게 가라앉았다.




  등교, 등원 준비로 바쁜 아침. 벌써 8시가 넘었다. 15분 전에는 집에서 나서야 하는데 아이는 그제야 여유롭게 싱크대로 걸어가 양치질을 했다. 얼른 해, 빨리 끝내고 옷 입어, 여러 번 외쳐봐도 늘 엄마만 바쁘다. 엄마는 늦어도 상관없어, 너희 일이니까 마음대로 준비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꾸욱 눌러 삼켰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까칠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엄마 미워, 소리 지를 게 분명하다. 괜한 실랑이로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까칠이에게 다가가서 칫솔을 건네받으며 양치질을 바쁘게 마무리하며 다음 준비를 재촉했다.


  순둥이는 방에서 밥을 먹다가 엄마의 조급함을 느꼈나 보다. 6살이 들기에는 다소 큰 밥상임에도 팔을 쫙 뻗어 들고 거실로 나왔다. 밥상 위에는 물컵이 올려져 있었다.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떨어뜨릴까 봐 불안해 보였다. 그대로 두라고 말할까 생각하던 순간, 예상대로 물컵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거실은 흥건해졌다. 순둥이는 나를 쓱 쳐다보더니, 엄마가 알아서 하라는 듯 매트 위에 앉아 평화롭게 티브이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다음 일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안 그래도 바쁜데, 물까지 쏟으면 어떡해!

  순간 분노가 일었다. 그러다 내 표정을 한번 살피고 알아서 하라는 공주님의 새침한 태도에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것도 '글감'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다행이다. 화를 잘 참았다. 순둥이는 토끼 만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너도 유치원 갈 준비 해야지. 얼른 양치질하러 와. 순둥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진짜 안 들리는 건지, 안 들리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답답한 내가 움직여야겠다. 아이를 안아서 싱크대로 향했다. 거실의 물은 조금 이따 닦자. 오늘도 엄마만 바쁘다.




  글쓰기로도 진정이 되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변기 물을 내리고 바로 나오려는 까칠이에게, 손 씻고 나와, 라고 말했더니,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귀찮았나 보다. 손 씻는 건 아주 중요해. 화장실에 세균이 많거든.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을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까칠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귀찮은 것을 시키는 엄마에게 짜증이 났던 걸까. 언성은 높아지지 않았지만, 손을 씻지 않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못마땅해하던 내 표정이 문제였을까. 빨리 나와서 놀고 싶었는데,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야 해서 속상했던 걸까. 까칠이는 있는 대로 화를 내뿜었다.

  순간, 나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야, 엄마가 틀린 말 했어? 한번 소리를 빽 지른 뒤,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계속 있다가는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니까 자리를 피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엄마에게 함부로 대들고 소리 지르는 모습을 생각하니 버릇없고 예의 없게 느껴졌다. 목구멍에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글감이다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괜찮아진 것 같았다. 진정된 줄 알고 거실로 나갔다가 새초롬히 나를 보는 까칠이의 눈빛에 다시 화가 치솟았다. 거실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과 장난감이 마음에 들지 않고, 양치한다며 싱크대 밑에 여기저기 물이 떨어져 있는 것도 화가 났다.

  너희, 정말, 엄마 힘들게 할 거야!

  화산이 폭발하듯, 오늘도 또 소리 지르는 엄마가 되었다.




  이것도 글감으로 승화시켰으니, 언젠가 다정한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화를 다스릴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본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드래곤 엄마'가 아주 가끔씩만 등장하기를.



상단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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