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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날 현 May 08. 2020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주

이 노래가 뭐라고.

 


     나에게 사춘기는 다행히도 요란스럽지 않았다. 어느 반에나 있을법한, 안경 쓰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교복을 줄여볼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고, 친구들 모두 갖고 다니던 휴대폰도 없이 수험시절을 보냈다. 해마다 반장과 서기를 번갈아 맡으면서 성실히 학교에 다녔고, 각 과목 선생님들마다 수업이 지루해질 때쯤 꺼내던 교실 밖 이야기를 기다리며 학교에 있는 시간을 퍽 좋아했다.


     방과 후엔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자료실에 잠들어있는 온갖 로맨스 소설을 한 번쯤은 모두 꺼내보았고, 열람실에 앉아서 색색깔의 형광펜과 볼펜으로 내 분신 같은 일기장에 그 시절의 감정을 성실히 기록했으며, 매해 바뀌던 나의 소녀 친구들에게 우리끼리만 알 수 있는 키득거림을 우리만의 언어로 꾹꾹 눌러 담아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편지를 써나가면서, 내 사춘기는 겉보기에 조용히 지나갔다.


     물론, 나에게도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열다섯 살 때 난생처음으로 왜 눈물이 나오는지도 모르게 문득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나는 그 날,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혼자서는 어찌해볼 수도 없을 만큼 마음이 슬퍼지고 말았던 거다. 눈물을 매달고 열람실을 뛰쳐나와서 휴게실에 비치된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매일 밤 10시에 도서관으로 데리러 와주시는 엄마에게 지금 당장 와달라고 꺽꺽 울음을 삼켜가며 애걸했다. 아마 그때가 내 사춘기의 초입이었을게다. 딱히 반항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에만 틀어박혀 지낸 것도 아니었지만, 내 사춘기는 모든 종류의 다채로운 감정이 오로지 하나의 배출 수단, 눈물로만 나왔다.


     특히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내 증상은 심해져만 갔다. 봄볕이 완연해진 4월 중순이면 푹한 날씨에 블라우스 소매 단추를 열어 둘둘 말아 올리면서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바로 그 봄기운에 내 가슴은 울렁이기 시작했다. 울렁임은 혼자 있는 시간에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 가끔은 나도 모르는 사이 불쑥 얼굴을 내밀어 나를 당황시켰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중2 음악수업 중 가창 시간.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른해진 5교시 음악실,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오후의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봄바람이 살랑, 불 때마다 하얀 커튼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걸 지켜보며 내 울렁임은 시동을 걸고 있었다. 가창 시간엔 노래를 본격적으로 부르기에 앞서서 가창곡을 다같이 조용히 들었는데, 안 그래도 시동 걸린 나를 봄날의 노래가 기어코 터뜨리고야 말았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넛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주

 

나는야 봄이 오면 그대 그리워

종달새 되어서 말 붙인다오

나는야 봄이 오면 그대 그리워

진달래꽃 되어서 웃어본다오

-  가곡 ‘봄이 오면’

 


    이 노래가 뭐라고. 나는 그만 목울대가 울렁거려서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꾹 참아야만 했다. 봄이 오면 꽃도 피고 내 마음도 피어,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가라는 이 가사가 꼭 내 마음 같았다. 아마 더 어렸다면 으앙 울어버렸을 만큼의 울음이 목 끝에 걸려있었다. 허나 울어버린들 음악 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에게 무어라 변명하기도 창피하니, 나는 울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이제 막 부드러운 가성을 쓰기 시작하며 제법 소프라노를 흉내 내는 여자애들과 변성기의 장닭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가곡을 부르는 남자애들 틈에서 나는 겨우 입만 뻥끗거리고 있었다.


    실은, 당시에는 아무에게도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이다 못해 자꾸만 울고 싶어질 수 있다는 걸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 틈틈이 한 번이라도 더 그 애와 눈을 마주쳐보려고 학교에 있는 내내 애쓰고 있는 나를 마주하는 게 속으로 힘겨웠던 거다. 이전에는 겪어보지도 못한 진폭의 울렁임을 그 작은 가슴으로 견뎌내느라 나는 온몸이 뻣뻣해진 채로 봄을 앓고 있었다.


    그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봄의 열병이 사실은 봄이라서 찾아온 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사랑이 오고 가는데 계절은 그저, 순간의 감정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줄 뿐이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해가 바뀌고 계절이 달라져 훈훈한 바람이 살랑 불어오면 그 봄의 울렁거림이 다시금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래서 아직도, 가곡 ‘봄이 오면’의 가사는 ‘근의 공식’ 만큼이나 또렷이 기억이 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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