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우리 모녀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이틀에 한 번씩 영상통화로나마 서로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나눈다. 엄마의 화장대, 부엌 카운터탑, 거실 테이블 위에 핸드폰 화면 속 내 얼굴을 올려두고 엄마는 전날의 모든 사건, 사고를 쉴 새 없이 전해주신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걸 달궈진 핸드폰의 열기로 깨닫고는 서둘러 통화를 종료하려 하다가도, ‘참, 그건 어떻게 됐어?’ 한마디에 다시 십분, 이십 분이 연장되는 날이 부지기수다.
그 많은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아빠의 얼굴과 목소리는 <지나가는 행인 1> 정도로 아주 잠깐씩 비추어지고 만다. 지나가는 행인 1이 등장하지 않는 날도 더러 있다. 그러나 아빠의 안부와 근황은 엄마를 통해서 이미 충분히 전해 들었기에, 나는 굳이 아빠를 부르거나 우리 모녀의 대화에 함께 하시도록 청하지 않는다. 다 큰 딸과의 대화가 익숙지 않은 아빠 역시 그 오랜 시간 동안 엄마와 내가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세상만사 온갖 주제로 웃고 떠들어도 구태여 등장하지 않으신다.
충남 삽다리 출신의 나의 아버지는 언어에 대한 의미가 엄마와 나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이, 그랴. 잘 살어.” 만으로도 타국에 살고 있는 딸에게 표현할 수 있는 애정을 최대치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니 말이다. 그러나 말로써 발화되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의 전부라고 여겼던 어린 나에게 아빠의 언어는 그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빈약한 말에서 당신의 마음을 읽어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무엇보다 아빠의 마음을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아빠의 언어로 인해 엄마가 마음고생하시는 걸 여태껏 지켜보면서 심지어는 아빠 같은 남자랑은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적도 있었더랬다. 생전 간지럽고 살가운 말을 식구들한테 해보신 적 없는 나의 아빠. 그게 남자고, 아빠고, 가장이라고 생각했던 아빠의 아빠의 아빠로부터 물려받아 체화된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 남자와 살 부비고 살다 보니 엄마와 나는 결국 아빠의 언어가 아닌 그의 비언어적 표현을 해석하며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말았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엄마와 백화점에 다녀와서 안방 침대에 새 옷가지를 잔뜩 펼쳐놓고, 옷장에 있던 기존의 옷들과 매치해보느라 모녀가 한 시간은 족히 거울 앞에서 정신이 없을 때. "여보, 나 이뻐?" "아빠, 딸 어때?"라고 물어보는 두 여자에게, 아빠는 물어보니 어쩔 수 없이 대답해주신다는 듯이 단 한 마디를 던져주시곤 했다. “훌륭햐.” 그때는 단지 그렇게밖에 표현을 못하시는 아빠가 야속했다. ‘아이구 우리 마누라 이쁘네, 그 색깔 아무나 못 입는 건데 역시 울 마누라가 입으니 옷이 사네. 우리 딸은 어쩜 그리 예쁘냐, 그 옷이 아주 딱 잘 어울려,’ 등등. 새 옷을 걸쳐 입고 한껏 기분 내고 있는 두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세상에 얼마나 많고도 많은가. 하는 수 없이 딱 한마디 건네시는 아빠한테 나는 마냥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만 가득했다. 하지만 그때의 아빠를 가만히 다시 떠올려보면 아빠의 눈빛과 표정에선 이미 내가 바라던 그 모든 말들을 다 표현하고 계셨다. 우리 모녀를 쳐다보시는 그 흐뭇한 눈빛과 입꼬리를 슬쩍 올리시던 표정이 사실은 말보다 더 정직하게 아빠 마음을 보여주고 계셨던 거다.
물론 아빠의 따뜻한 사랑을 말로써 바로 듣고 직접 느낄 수가 없으니 그 자리에서 단박에 알아채기는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아빠의 함축된 충청도식 농담 한마디에도 수십, 수백 마디의 진심이 담겨있으며, 그걸 전달할 때의 아빠의 목소리 톤과 눈빛에 나머지 진심이 묻어 나온다는 걸 이제야 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한가위에 둥근 보름달을 보면서 일 년 치 바람을 줄줄 쏟아내는 나와 달리, “달님, 알쥬?” 라고 소원을 비는 분이 아니셨던가. 그래서 오늘은 엄마와의 영상통화 중에 역시나 지나가는 행인 1로 얼굴만 비추고 급히 퇴장하시는 아빠를 불러서 어쩐지 한마디를 건네고 싶었다.
“아빠! 알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