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타날 현 May 08. 2020

우리 집에 사는 불량품

'우행시'에서 하필 그 대목에


     열일곱 무렵,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다. TV 속 연예가중계에서 이나영과 강동원의 영화 홍보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영화화되면서 ‘우행시’가 유행어였던 시절이었다.


     영화가 담고 있는 사형제 폐지에 관한 찬반을 주제로 학교에서도 원작 소설이 필독서로 꼽혔다. 그 책을 읽던 중, 나는 사형제 폐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느 대목에 꽂히고 말았다.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은 어릴 적에 겪은 중대한 사건으로 인해 여러 번 자살시도를 한다. 멀쩡하게 어른 노릇을 하며 평범하게 사는 형제와 다르게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녀가 오랜만에 만난 고모 앞에서 토해내듯 속마음을 고백하는 장면 속 대사 한 꼭지가 그 무렵의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고모도 알잖아. 우리 집에서 엄마가 규정해버리면, 그러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 지겨워! 엄마한테 난 처음부터 늘 불량품이야.”


     ‘불량품’이란 단어가 내 입에서 되뇌어지는 순간, 스스로 갖고 있던 나에 대한 이미지가 그 언어 안에 갇히고 말았다. 우리 집에는 부모님이 빚은 성공작과 불량품이 나란히 있었다. 성공작은 우리 집의 자랑인 나의 오빠였고, 불량품은 그에 비해 늘 못 미쳤던 나였다.


     나와 두 살 터울인 오빠는 학교에 다니는 내내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오빠랑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4년간은 ‘아무개 동생’으로 불리기도 했고, ‘6학년에 어떤 형이 기말고사에서 또 올백을 맞았대’라는 소식을 쉬는 시간에 남의 일처럼 전해 듣기도 했다. 오빠는 중학교에 입학할 땐 전교생 앞에서 학생 대표로 선서를 하더니, 고등학교는 내가 꿈꿔보지도 못할 영재학교로 입학을 했더랬다.


     해가 갈수록 동네에서 공부 잘하기로 점점 더 유명해지던 내 오빠는 하필 착하기까지 해서 나는 차마 그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울고 불고 떼쓰며 부모님 속을 뒤집어 놓는 건 매번 내쪽이었다. 엄마 표현으로 ‘깎아놓은 알밤 송이’ 같은 성공작인 오빠에 비하면 나는 우리 집에 사는 불량품 같았다.


     불량품에 대한 기대치는 항상 넉넉했다. 오빠가 과목에 문제 하나만 삐끗해도 엄마의 억장이 무너지는걸 바로 옆에서 지켜봤건만, 나는 전과목 평균 점수가 90점만 넘어도 우쭈쭈를 받았다. 매년 시험기간마다 오빠가 받아온 과목별 점수는 줄줄 꿰고 있는 엄마에게, 내가 죽을 둥 살 둥 열심히 공부해서 받아온 점수에는 ‘오구 잘했다’ 정도로 퉁쳐지는 게 정말이지 억울했다. 그러나 어차피 내 머리와 노력으로는 오빠를 따라잡을 수도 없으니, 울컥 화가 나다가도 곧 한숨 한 번에 포기하고 말았다.


     공부를 그렇게 잘하고 좋아하던 오빠는 아직도 공부를 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쉽게 설명해주어도 뒤돌아서면 ‘그래서, 우리 오빠가 뭘 연구한댔더라?’ 싶은 물리학을 업으로 삼아 매년 새로운 연구와 논문, 발표로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 어려운 공부를 즐거이 이어가고 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오빠랑 소주 잔을 부딪히며 마주 앉았던 그 어느 솔직한 밤에, 학창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불량품 프레임’에 대해 오빠에게 슬쩍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잘 나가던 오빠로 인해 어린 시절의 내가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나도 학교에서 나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에만 들어서면 얼마나 보잘것없이 보였는지, 술김에 울컥거리는 목소리로 한참을 풀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투정마저도 오빠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한 과목에 하나만 틀려도 실수했다는 자책감과 부모님께 끼칠 실망감으로, 안 그래도 체구가 작은 우리 오빠는 학창시절 내내 짓눌려 살았던 모양이었다. 그에게 처음으로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오빠는 한번도 넘어져본 적이 없으니 두 어깨가 가뿐할 거라고 시기하기만 했던 어린 나에게 몰래 누군가 살짝 알려줬더라면 오빠를 그렇게까지 수만 번 째려보진 않았을 텐데...


     성공작으로 사는 삶도, 불량품으로 사는 삶도, 버거운 건 참으로 공평했다. 그걸 알 턱이 없던 그 시절의 나와 오빠를, 그리고 우리의 엄마를 가만히 토닥여주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달님, 알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