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스무 살만큼 기다렸다가 맞이하는 나이가 또 있을까. 나에게 스무 살은 물리적인 나이를 넘어서 무언가 대단한 선물이자 성취와 같은 것이었다. 스무 살이 되면 이전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가 펼쳐질 거란 기대감으로 꾸역꾸역 버텨냈던 시간이 있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애먼 남자 선생님과 아이돌 그룹에게 전이하던 고달프고 애달팠던 여고시절, 벚꽃이 거리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어도 중간고사 준비로 애써 못 본 척해야만 했던 숱한 봄날은 너무나 잔인하기만 했다. 좁은 교실에서 서른 명이 함께 숨 쉬며 아침 7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갇혀 있어야 했던 숨 막히던 하루하루는 또 어떻고. 내 가치가 소고기 등급처럼 시시때때로 매겨지던 월별 모의고사, 중간 기말고사, 수행평가, 논술시험까지. 이 모든 걸 견뎌내기에 스무 살이라는 단어보다 더 달콤한 보상은 없는 것만 같았다. 나의 스무 살은 반드시 눈부셔야만 했다. 그래서 눈 돌리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나만의 각오를 새겼다.
‘눈부신 스무 살을 위해’
당장 책상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때마다 나를 잡아둔 건 그 한 문장이었다.
찬란하게 맞이한 나의 스무 살은, 참으로 달디달았다. 내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서 계획해보는 달콤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수원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씩 걸리던 지하철 1호선도 마냥 즐거웠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빛깔이 달라보였다. 그토록 염원했던 스무 살이었는데, 눈부신 스무 살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나는 서른을 향해 점점 가까워졌고 갈수록 초조했지기 시작했다. 발음해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던 스무 살과 다르게 서른의 어감은 왜 그리도 무겁고 칙칙하게만 느껴지던지.
여자의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같다며, 스물네다섯에 제일 잘 팔리고 서른이면 페기처분될 거라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때마다 덜컥 두려웠다. 안타깝게도 그런 성차별적인 발언을 야무지게 걸러들을 귀도 없었고, 여자 나이에 유난히 점수 매기려는 비정상적인 사회에 당돌하게 대꾸할 입도 없었다. 경험치가 없으니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가려낼 기준조차 있을 리 만무했다. 나이 드는 걸 무서워하기 시작한 시기가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이십 대였다니. 서른이 와버릴까 봐 안절부절못했던 시간들이 이제와 아깝다.
수능시험만 준비하느라 그 이후의 계획은 막연하기만 했던 고3의 겨울방학처럼, 이십 대에는 서른 살 이후의 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기다리지 않았던 서른 살이 기어코 오고야 말았을 때, 나는 덤덤했다. 서른이 되었음에 오히려 편안했고 도리어 감사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야 여전했지만, 이십 대에 허겁지겁 채워 넣은 경험 덕분에 나는 확실히 더 나다워져 있었다. 차라리 없는 셈 치고 싶었던 경험마저도 그때 겪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몰라서 헤매고 있었을게다.
나를 배웠고 세상을 맛보았으니 앞으로 맞이할 마흔은 어쩌면 더 달콤할지도 모르겠다. 고3 때만큼 눈 돌리는 곳곳마다 새겨놓지야 않겠지만 일기장 앞장에라도 적어두고 기다려보고 싶다.
눈부신 마흔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