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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날 현 Oct 21. 2020

잎으로 보이고
꽃으로 보이게 해주소서

     늦은 밤, 엄마는 부엌에서 오래된 사기그릇에 물을 뜨고 있었다. 모두가 잠들 채비를 하고 방에 들어갔지만 엄마만 혼자 부엌에 남아 조용히 정화수를 올리고 있었다. 엄마는 그녀를 키워준 할머니가 그러셨듯 모든 집의 부엌을 조왕신이 지켜준다고 믿었고, 우리 가족을 위해 조왕신께 올릴 물을 뜨고 있었다. 할머니 댁에서 가져온 반백 년도 더 된 사기그릇 위로 물이 봉긋하게 올라와서 한 방울만 더해지면 곧 넘쳐버릴 것처럼 더는 담을 수 없을 때까지 엄마는 온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정화수 그릇을 조심스럽게 부엌 한 켠에 올려두고 그 앞에 서서 소리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우리 아들딸이 누구에게나 잎으로 보이고, 꽃으로 보이게 해주소서.”


     기도문은 엄마의 할머니의 것과 같았다. 시골 노인네가 시처럼 말할 때가 있었다며 엄마가 감탄해 마지않던 바로 그 기도문이었다. 초등교육도 못 받으셨던 까막눈 할머니에게서 어찌 시인의 감성이 담긴 기도문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엄마는 기도문을 입에 올릴 때마다 탄복했다. 대단한 성공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막대한 부를 바라는 것도 아닌, 어리디어린 손녀가 세상에 나가 모든 이에게 ‘잎’과 ‘꽃’으로 보이길 소망했던 할머니의 지극한 마음을 딛고 성장한 엄마였다.


     잎으로 보이고 꽃으로 보이길 염원해준 엄마 덕분에 나는 무럭무럭 자라서 제 앞가림을 하는 성인이 되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허영을 좇느라 급급했던 이십 대가 지나고, 마치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서른도 넘겼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고 나자 내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져보려 안달했던 것들은 의미를 잃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내게서 멀어지지 않는 그 무언가에 골몰했다. 그중에는 엄마의 정화수가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내가 무너졌던 모든 순간에 우리 집 부엌에는 정화수가 올려져 있었다. 내가 목표로 삼았던 대학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이 날아든 막막한 저녁에도, 실연에 아파하며 집안에만 틀어박혀 울던 주말에도, 정규교사 채용에 미끄러지고 분해서 잠 못 이루던 새벽에도, 엄마가 떠놓은 정화수가 사기그릇에 가득히 담겨 있었다. 당시엔 효험도 없이 부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물그릇이 얄밉기도 했다. 잎과 꽃으로 보이게 해달라는 기도만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조왕신께서 정확히 알아채 주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엄마의 정화수가 톡톡히 한몫해줄 거라고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일이 늘어감에 따라 고작 물 한 그릇 떠놓는다고 안 될 일이 되겠냐며 엄마에게 툴툴거리는 날도 늘어갔다. 그런데도 깊은 밤이면 엄마는 어김없이 물을 떠놓았다. 우리 딸이 누구에게나 잎으로 보이고 꽃으로 보이게 해 달라고…….



     적요한 밤, 이제는 나 역시 엄마가 그랬듯 부엌에서 정화수를 올린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으로 시집올 때, 정화수 그릇으로 쓸 목적으로 친정집에서 사기그릇 두 점을 챙겨왔다. 할머니가 쓰시던 복 복(福)자가 적힌 옛날 그릇은 태평양을 건너와 미국 신혼집 부엌에서 조왕신을 모시게 되었다. 서양 집 주방에도 조왕신께서 왕림해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키워준 효험만을 굳게 믿기로 했다. 정수기 앞에 서서 두 손으로 공손히 사기그릇을 들고 물이 채워지는 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때면 조용한 밤에 물을 뜨고 있던 엄마와 그녀의 할머니가 절로 떠오른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간절한 마음을 그저 그릇에 그윽이 담아내는 것 말고는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세상에 피어난 잎과 꽃보다 어여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묵묵히 차오르는 깨끗하고 투명한 물을 보고 있노라니 그릇 위로 볼록하게 올라오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귀하게 느껴졌다. 부엌 한쪽에 아예 마련해둔 자리에 물그릇을 살며시 올려두면서 나의 엄마가 외고, 그녀의 할머니가 외던 기도문을 나 또한 중얼거려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잎으로 보이고, 꽃으로 보이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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