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넘지 않은 거리, 딱 반 걸음
“엄마! 이꼬 뭐야?”
서재에서 놀던 아이가 무언가를 들고 종종종 뛰어온다.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 한 손에는 조그마한 종이 조각도 보인다.
“어디 보자... 어머, 카드네!”
초록색 네 잎 클로버 모양의 조그마한 카드를 열어보는 순간, 얼굴에 배시시 빙그르 미소가 퍼진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과 이야기가 톡 하고 떨어져 나온다. 올망졸망 그림만큼이나 싱그러운 기억, 가슴이 괜스레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고, 읽어보고, 알고 있을 법하지만, 정작 그 경험을 한 사람은 많지 않은 책 몇 권을 골라 봤어. 말 그대로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소유하지는 못한 것. 사람은 그렇게 하기 어려우니, 물건으로 하도록 하자.”
하얀 책 귀퉁이들이 노릿노릿 변해갈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에게 풋풋함으로 남아있는 사람. 아, 내가 이런 선물을 받았었구나. 10년도 훌쩍 넘어서야, 이제서야 나에게 전달된 것 같은 이 마음, 짧은 글을 괜히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본다. 나를 위해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한 권 한 권 집어 들었을 그 사람의 모습이, 조그마한 카드를 골라 놓고 깨알만 한 글씨로 담기 시작한 다정한 마음이 배어 나온다.
그를 생각하면 스물 초반의 풋풋하던 대학시절로 돌아간다. 누가 보아도 캠퍼스 커플처럼 가깝고 다정했지만, 커플은 아니었던 사이. 한 발 늦게 만난 게 못내 아쉽고 은근히 질투도 날 만큼 오래된 여자 친구가 있었던 그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와 동갑이던 여자 친구는 일찌감치 졸업해 저 멀리 지방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었던 덕분에 얼굴 한 번을 본 적이 없었으니. 생명공학을 전공했던 그와 영문학을 전공했던 나는, 이중전공이라는 멋진 제도 덕분에 3, 4학년 네 학기 동안 정경대학에서, 정치와 외교와 신문과 방송을 공부하며, 늘 함께했다. 학교 안에서의 모든 일상에 서로가 있었다. 강의 시간이면 늘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뽑아 들고 해맑게 웃으며 내 옆으로 스윽 들어와 앉던, 한참 어린 동생 챙겨주듯 늘 나를 살뜰히 챙겨주던, ‘오빠’라는 호칭이 참 잘 어울리던 그였다.
그가 한 학기 먼저 졸업하는 바람에 대학의 마지막 학기는 허전하고 쓸쓸했다.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 건지, 입사 첫 해 그 바쁜 틈에서도 그는 첫 월급을 탔다며 찾아와 여의도 어느 빌딩 꼭대기의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사주었고, 시험 기간에는 학교에 불쑥 나타나 어둔 밤이 다 되도록 도서관 옆자리를 지켜 주었다. 내가 졸업하던 날엔 연락도 없이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나타났고, 취업 시험에 합격했을 땐 ‘회사에 다녀보니 책상 서랍에 이거 하나 있으면 좋더라’며 아주 조그맣게 접히는 연둣빛의 예쁜 우산을 선물해주었다.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곁을 지켜주던 사람. 은근히 설레는 마음은 꾹 참고 눌러 둔 채로, 늘 막내 동생처럼 졸랑졸랑 나는 그를 따라다녔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반 걸음 뒤에서.
그렇다. 우리 사이엔 딱 그 반 걸음이 있었다. 남들이 커플로 오해를 할 때 웃으며 손사래를 칠 수 있었던 것도, 서로의 옆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때조차 다정하게 일상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서른 후반에 닿은 오늘 이 순간에 떠올려도 그저 풋풋하고 싱그러운 느낌만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도, 그 반 걸음 덕분이다. 그가 건너오지 않고, 내가 넘어서지 않은 딱 그 정도의 거리.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르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 거리를 좁혀보고 싶었는지. 내가 부산으로 발령받은 첫 해, “부산 한 번 갈게!”라는 수많은 친구들의 수많은 빈말들과는 달리, 가장 먼저 내려와 나의 허전할 뻔한 주말을 달래주고 돌아가던 그의 뒷모습. 여의도에 벚꽃이 흐드러지면 캠퍼스를 걷던 마음으로 함께 산책하자는 그의 말에, 4월이 되자마자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날아가 윤중로에서 한강변을 따라 몇 시간을 걷고 걷고 또 걸었던 나의 그 날들. 아슬아슬하게 그 반 걸음 사이를 오가던 우리의 마음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서로를 바라보던 그 조심스러운 순간들, ‘많이 알고 있었지만 소유하지는 못한 것, 사람은 그렇게 하기 어려우니 책으로 하자’ 던 그 마음...
그렇게 두길 참 잘했다. 아슬아슬 흔들렸지만 넘어가지 않아 다행이다. 함께한 모든 순간이 풋풋하고 아름답게 간직될 수 있어서. 남녀 간의 친밀한 관계란 종국에 이르러서는 빛이 바래고 일그러지고 깨어지게 마련이지만, 다정한 친구와의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고 진해지는 법이니까. 거기에 결국엔 표현하지 못하고 이어지지 못한 스물 초반의 어떤 설레는 마음들이 저 구석 어딘가에 숨어 가끔씩 반짝 하고 빛을 낼 테니 말이다.
그는 그의 오래된 여자 친구와 결혼을 했고, 자기와 똑 닮은 딸과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서로의 배우자를 배려하느라, 혹은 일상의 바쁨을 핑계로 거의 소식을 전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씩 날아오는 짧고도 다정한 메시지에, 문득 떠오르는 지난날의 싱그러운 추억에, 때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 남아있는 흔적들에, 그때의 감정과 기억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오늘 봄이가 서재에서 뭘 찾아왔게?"
“우와! 풋풋한 기억.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을 소환해 준 두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콤한 오후의 데이트를 선물합니다. 봄이에겐 과일 주스로 바꿔주고!”
달콤한 구름 케이크와 고소한 카페라떼 2잔을 담아 도착한 기프티콘. 적당히 유지해 온 거리 덕분에 여전히 가까이에 있고, 소유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 오히려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게 된 인연의 역설을 돌아보며, 진작에 다 읽은 것 같으나 무언가 생경한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