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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Dec 08. 2023

아이의 시험지를 보다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 나 단원평가 시험지 식탁 위에 올려둘게. 사인 좀 부탁해."


마냥 아기처럼 응석 부리며 집안에서 굴러다니는 아이는 어느덧 초등학교 3학년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1, 2학년 때와는 달리 '진짜 학습'이 시작되는 나이라며 여기저기서 무시무시하게 겁을 주며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라고 떠들어대던 것과 달리, 올 한 해도 별 탈 없이 무사히, 우리답게, 잘 마친 것 같다. 아이는 여전히 학교를 너무도 좋아하고 수업시간을 즐거워하며, 집에 와선 너댓 살 때나 다름없이 뒹굴뒹굴 하염없이 자유롭게 지내고 있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평가지 한 장. 수학 '들이와 무게' 단원이다. 밀리리터와 리터, 그램과 킬로그램 뭐 이런 개념들을 배우는 단원인데, 찬찬히 하나하나 아이가 풀어간 시험지를 살펴보다 문득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주책맞게. 재빨리 눈을 깜빡여 눈물을 꿀꺽 삼켜본다. 말도 못 하고 '어어, 마, 음마, 엄마' 이러던 아기가 언제 이렇게 커서 측정값을 어림하고, 단위가 다른 수치를 더하고 빼고, 문장 속에 살짝 숨은 함정까지 밑줄 딱 쳐가며 풀어낼 수 있는 '학생'이 되어버린 건지. 여전히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 품으로 쏙 달려와 대롱대롱 매달려 안기고 얼굴을 부비고 푹신한 소파 위에서 한참을 끌어안은 채 뽀뽀를 쏟아붓는 그 아기와, 이 시험지를 빼곡히 채워나간 학생의 간극이 새삼스럽다.


엄마를 '전혀' 닮지 않은 악필이 조금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아이 특유의 구불구불 오밀조밀 그려낸 숫자들 사이로 제법 진지했을 아이의 시험시간이 슬며시 묻어난다. 요 문제를 보았을 땐 '이건 너무 쉽잖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쓱쓱 써 내려갔겠고, 이 문장에서 '각각'을 발견하고 같은 수를 두 번 빼면서는 스스로 얼마나 통쾌했을까. 그까짓 단원평가가 뭐 대수라고 시험지를 제출하고 집에 온 날은 '엄마, 나 몇 점 맞았을까?'를 수없이 물어보며 궁금해하고, 백점이라도 맞아오는 날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부터 가방을 열어 시험지를 꺼내보여 주는 이 아이가, 난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요 조그마한 머릿속에 점점 더 많은 세계가, 추상적인 단어와 확장된 개념들이 소복소복 쌓여만 가는 것이 참으로 신비롭고 신기할 따름이다.


아이의 풀이과정을 볼 때면 뱃속이 간질간질하다. 너무 귀여워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아이의 속도가 가끔은 무섭다. 갓난아이 시절부터 늘 "봄아, 천천히 자라줘."를 입에 달고 산 나였지만, 세월은 역시 흐를수록 가속도가 붙는 법. 아이는 말 그대로 '쏜살같이' 내일, 또 내일을 향해 날아가고 있고, 여전히 품 안에 있지만 사실은 꽤 많이 품에서 벗어나버렸다. 아마도 머지않은 날, 품에서 완전히 떠나버린 아이를 그리워할 순간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문득문득 서글퍼지겠지만, 동시에 온전하게 화사하게 피어난 아이를 바라보며 그 나름의 행복에 잠기기도 하겠지.


하지만 부디, 부디 그날이 천천히 왔으면. 이토록 소중한 오늘이 지금 이 순간 이대로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지만 각자의 세계에서 충실히 지낸 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 서로 다다다다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 하염없이 볼을 부비는 이런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부질없는 바람인 줄 알면서도 이토록 간절히 바라본다.



아직도 도토리, 나뭇가지 주워 소꿉놀이 하는 게 제일 좋은 아홉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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